왼쪽부터 이점례씨, 권경열씨, 조영희씨

1950년 9월,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이 낙동강 유역까지 다가왔을 무렵, 당시 육군은 부족한 전력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하려고 대구와 부산에서 여성 의용군 1기 500명을 긴급 모집했다. 이들은 남성 군인들과 함께 훈련받고 전·후방에 투입돼 작전을 수행했다. 당시 여성 의용군 1기 지원자만 2000여 명에 달했다. 성별과 무관하게 똑같이 전쟁의 참상을 겪었고, 똑같이 가족과 이웃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인 김명자(90)씨는 대구에서 딸만 다섯 있던 집안의 둘째였다. “옆집 남자들은 다 나라 지키러 나가는데 우리 집은 사람이 없어 내가 (군대에) 지원했다”고 했다. 당시 열여덟이었던 그는 대구여고 3학년 학생이었다. 1기 여성 의용군은 영어와 국어, 체력 시험을 봤다. 합격 통보를 받은 후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훈련소가 있는 부산으로 향했다. 훈련소에서 소금을 조금 탄 국과 새까만 보리밥을 먹으며 소총을 쏘고 화생방 훈련도 받았다.

그는 전쟁에서 강원도 영월에 있던 정훈 대대 소속으로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신문을 만드는 보도 장교로 일했다. 강원도로 떠나는 길에 기차역에서 누군가 부른 서글픈 노래가 지금도 귀에 맴돈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조선 왕조 오백 년 허무하도다. 이 몸이 죽어 나라가 선다.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하는 내용이었다. 영월에선 개성 상공에 삐라(전단)를 뿌리려고 비행기도 탔다. 비행기를 향해 북한군이 쏘아 올리던 총탄이 아찔했다.

1952년 8월 여성의용군들이 훈련소에서 카빈 소총으로 사격 훈련을 하고 있다. 육군은 1950년 9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부산과 대구 지역에서 여성의용군을 모집했다. 여성의용군 1기생은 500명을 모집했는데 2000여 명이 지원했다. 6·25에 참전한 여성의용군은 1기부터 4기까지 1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국가기록원

본지는 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경기도 광명과 서울 일대에서 여성 의용군 1기인 김씨와 이점례(90)씨, 의용군 3기 권경열(88), 조영희(87)씨를 만났다. 이들은 “가족과 이웃을 지키는 데는 성별이 없다”며 “대한민국 군인이었던 것이 평생 나의 자랑이었다”고 했다.

이 중 의용군 동기였던 조영희씨와 권경열씨는 현재 서울 강동구의 같은 아파트 단지 이웃이 돼 자매처럼 지낸다. 매일 마주 앉아 군대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조씨는 1952년 서울에서 군인과 민간인들의 피 묻은 옷을 빨래해주다 여성 의용군에 자원했다. 그는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자주 보니 참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했다. 그는 강원도 양구 일대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선전 방송을 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휴전협정일인 1953년 7월 27일에도 양구의 한 전선 부근에 있었다. 정전이 시작되는 밤 10시 직전까지 남북 군인들은 서로 요란하게 총을 쏴댔다. 조씨는 “밤 10시가 되는 순간 기가 막히게도 총소리가 뚝 멎었다. 갑자기 주변이 고요해지는 그 순간 느낀 기분을 지금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정말 기가 막혔다”고 했다.

권경열씨는 북한군이 터뜨린 포탄 파편에 복부를 맞아 부상한 오빠를 간호하다 여성 의용군에 자원했다. 당시 권씨의 부친과 오빠는 동대문에서 쌀 장사를 했는데, 북한군이 퇴각하며 서울 곳곳에서 폭탄을 터뜨렸다. 권씨는 “내가 오빠 대신 입대하겠다고 하니 오빠가 아무 말이 없다가 ‘그래, 가라’ 한 게 기억난다”고 울었다.

이점례씨는 1.4후퇴 당시 황해도 사리원 최전방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그는 “체격도 크고 총을 잘 쏴서 훈련소에서 M1 소총 부대에 있었다”며 “북한군 한 명이라도 쏘고 싶어 전방을 나가겠다고 자원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계급표가 붙은 모자에는 경례를 해도 여성 상관들에게는 경례하지 않는다는 시절이었다. 이씨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고 패잔병들의 정신 교육을 해 부대에 복귀시키는 등 성과를 거뒀지만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훈장은 남자들만 다 나눠 가졌다”면서 “여자들이 한 일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군인이었음을 평생 자랑스러워하며 살았다고 했다. 권경열씨는 “나는 이렇게 나이 먹도록 살 수 있던 게 여태껏 군인 정신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며 “군인처럼 정의롭고 떳떳하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