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흰 의사 가운을 입고 진료하고 있는 윤주홍(맨 오른쪽)씨의 모습. 아픈 아이의 윗옷을 간호사가 걷어 올리자 청진기로 진찰을 하고 있다. 그는 1973년 당시 판자촌이었던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윤주홍 의원’을 열었다. 어려운 주민들을 생각해 진료비를 절반만 받거나 무상 진료를 했고, 의료 환경이 열악한 섬마을에 왕진을 다니기도 했다. /서울기록원

“20대 때 7년 간 결핵을 앓아 죽다 살아난 경험을 했습니다. 새 삶을 얻고 나니 ‘사람을 살리고 봉사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경찰청과 조선일보사가 운영하는 청룡봉사상 56회 인(仁)상 수상자 윤주홍(88)씨는 ‘봉천동 슈바이처’로 불린다. 그는 1973년 당시 판자촌이었던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윤주홍 의원’을 연 뒤, 지난 2019년까지 46년 간 아픈 환자들을 돌봤다. 그는 진료비에 연연하지 않았다. 평생 형편이 어려운 주민들의 주치의로 살았다. 가난한 주민들을 생각해 진료비는 다른 지역의 절반 수준만 받았고, ‘돈이 없다’는 사람들에겐 무상 진료를 해줬다.

윤씨는 수십 년 전 한 청년이 주문하지도 않은 자장면 한 그릇을 철가방에 담아 가져왔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청년은 “선생님, 저를 기억하시나요? 어렸을 때 갑자기 밤에 배가 아파 선생님 병원으로 왔던 아이입니다”라고 했다. 수 년 전 인근 보육원에서 교사가 밤중에 맹장염을 앓는 아이를 데려왔는데 당시 윤씨가 돈을 받지 않고 수술을 해줬다는 것이다. 이 아이는 이를 기억하고 있다가 서울 강북구의 한 중국집에 취직한 후 윤씨를 찾아온 것이다. 들고 온 자장면 한 그릇은 첫 월급으로 산 것이었다. 윤씨는 “아이의 마음이 고마워 눈물을 흘리며 자장면을 먹었습니다. 그야말로 눈물 젖은 자장면이었죠”라고 했다.

하루는 새벽 왕진(往診)을 다녀오는데 갑자기 낯선 2명이 칼을 꺼내 들고 윤씨에게 다가오는 일도 있었다. 그 때 한 강도가 갑자기 다른 강도에게 “야, 이 사람 윤주홍이야. 며칠 전에 우리 아들도 치료해줬단 말이야”라고 했다. 이후 강도들은 눈빛을 주고받더니 저만치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청룡봉사상 수상자 윤주홍씨가 17일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남강호 기자

윤씨는 매년 사람이 드나들기 어려운 섬마을을 찾아 왕진을 다니기도 했다. 의대 졸업 후 우연히 충남 태안군 안면도를 찾았는데, 열악한 의료·교통 여건 탓에 섬 주민들이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그는 매년 사비로 안면도, 간월도(서산), 내파수도(태안) 고대도(보령) 등을 찾아 의료 봉사를 했다. 그의 섬마을 왕진은 40년 넘게 이어졌다.

1994년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관악장학회’를 만들기도 했다. 윤씨는 “88올림픽 이후 서울이 급속도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이들은 학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며 “’사람들이 형편에 맞게 서로 조금씩 도우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후 “소액이어도 좋습니다. 조금만 도와주십시오”라며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000원을 내는 사람도 있었고, 장례를 치르고 남은 돈을 쾌척하는 사람도 있었다. 윤씨 역시 돈을 내 3억여원의 기금이 만들어졌고, 이렇게 만들어진 장학회는 지금까지 2000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2019년 그가 병원 문을 닫은 건 아내의 건강이 나빠져서다. 윤씨가 무료로 진료를 보고, 사비를 털어 왕진을 다닐 때도 아내는 잔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아내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라며 “이제는 아내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다만 작년 11월 고려대의료원에 의학발전기금 10억원을 기부하는 등 다른 이들을 돕는 삶의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병원 문을 닫고 남은 재산을 정리해보니 ‘가질 만큼 가졌으면 충분하다’ ‘성결교회의 원로장로로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기자가 윤씨를 만난 날도 윤주홍 의원이 문을 닫은 줄 모르는 한 여성이 “진료를 볼 수 있느냐”며 윤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전화는 지금도 매주 한두 번 걸려온다고 한다. ‘윤주홍 의원’은 문을 닫았지만, ‘의사 윤주홍’은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