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 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인 백모(18)양은 중2 때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엄마를 떠올렸다. “오빠와 날 키우느라 일을 그만둔 엄마가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는 그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 엄마나 ‘82년생 김지영’의 세상보단 나아지겠지만,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는 사회에서 변화의 속도는 너무 느릴 것 같아 답답하다”고 했다. 결혼과 출산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연애나 결혼을 하는 데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을 나의 커리어를 쌓는 데 쏟고 싶다”는 백양은 “아이를 좋아하지만, 내가 겪은 치열한 입시 과정을 아이가 겪는 게 싫다”고 했다.

/그래픽=박상훈, 백형선
/그래픽=박상훈, 백형선

대한민국의 10대 여성은 ‘여자라면 이래야 한다’ 같은 성별 고정관념이 가장 적으면서 성차별, 양성평등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세대다. 조선일보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16세 이상 남녀 1786명을 대상으로 한 ‘2022년 대한민국 젠더 의식 조사’에서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 10대(16~19세) 여성은 열 명 중 한 명(9.3%)도 안 됐고, 자녀를 갖고 싶지 않다는 응답률은 31.2%로 또래 남성(8.8%)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에게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도 매우 낮았다. ‘늦은 밤에는 남성이 여성을 바래다줘야 한다’(23.2%), ‘신체상의 위험 부담이 큰 일은 여성보다 남성이 감당해야 한다’(26.6%)는 문항의 찬성 비율이 전 세대 여성들 중 가장 낮았다.

각종 젠더 이슈에서도 10대 여학생은 남학생들과 큰 인식 차이를 보였다. 윤석열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인 ‘여성가족부 폐지’에 10대 남성은 10명 중 6명(59.1%)이 찬성한 반면 10대 여성은 10명 중 1명(10.6%)만 찬성했다. 여가부가 성별 갈등에 미친 영향에 대한 질문에도 10대 남성들은 ‘심화시켰다’(64.1%)고 했지만, 여성들은 ‘해소했다’(44.9%)고 응답했다. 10대 여성 중 과반(52.3%)은 동성혼에도 전 세대 가장 높은 응답률로 찬성했다.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 10대 여성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들여다본 공약도 젠더 공약(22.7%)이었다. 생애 첫 투표권을 행사한 고3 최모(18)양은 이재명 후보를 지지했다. 최양은 “선거 날짜가 다가오자 반에서 누구를 뽑아야 할지 토론이 벌어졌다. 같은 반 친구들은 거의 1번을 지지했고, 간혹 2번을 뽑겠다는 친구가 있으면 다 같이 설득해 마음을 돌렸다”고 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10대 여성은 긍정적이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또래 문화를 통해 본 청소년의 성평등 의식과 태도 연구’(2020)에 따르면 고2 여학생 35%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혔다. 12~17세 여학생 열 명 중 여섯 명(62.2%)은 페미니즘을 ‘남성과 여성의 성평등’이라고 정의 내렸다. 여학생들은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천 A여고 3학년 조모(18)양은 “젠더 문제에 관심을 드러내면 남학생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고 했다. 백양은 “학교 수행평가 때도 선생님들이 젠더 이슈로 발표를 못하게 한다”며 “입학사정관이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을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다”고 했다.

2005년부터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을 앞질렀지만 여학생들은 “교육 현장에서 양성평등이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최양은 “서울의 몇몇 여고에서 ‘스쿨 미투’가 벌어졌지만 교사의 혐의가 확인되고도 처벌이 미미해서 놀랐다”며 “4~5년 전까지 일부 여고 교훈에 ‘고운 몸매’ ‘겨레의 참된 어머니가 되자’가 있었는데 학생들 항의에도 꿈쩍도 안 하다가 뉴스에 나오자 바뀌었다”고 했다.

최윤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10대들의 성별 인식 격차와 상대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매우 커서 이들이 20대가 되면 젠더 갈등이 더 심해질 수 있다”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저출산 해결, 사회 통합 등이 요원하다”고 했다.

〈특별취재팀〉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김연주 사회정책부 차장, 변희원 산업부 차장, 김경필 정치부 기자, 유종헌 사회부 기자, 유재인 사회부 기자, 윤상진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