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이선민(54)은 30대 초반의 젊은 엄마 시절, 직장에서 돌아온 어느 날 9개월 된 딸과 자신의 사진을 연출 없이 찍었다. 사진‘자윤이네’(1999) 속 이 작가는 자신이 다려야 할 셔츠를 들고 있고, 방 안에는 다리미와 아이의 우유병이 있다. 그는 이 사진을 찍은 뒤 일과 가사, 양육 사이에서 지친 엄마와 아이의 일상을 찍는‘여자의 집’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가는“60년대생인 나와 90년대에 태어난 20대 딸이 소설‘82년생 김지영’을 읽고 함께 울었다. 여성의 일·가정 양립과 경력 단절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이선민 작가

국내 명문 대학 이공계열 박사학위까지 받은 이모(38)씨는 중견 기업 연구원으로 일했지만, 2년 전 둘째 아이를 가지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그는 “큰애 때 육아휴직을 했는데, 둘째 가졌다고 또 휴직하기가 눈치 보여 퇴사를 선택했다”고 했다. 둘째가 어린이집을 다니게 된 지난해 말부터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섰지만 아직 합격 연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씨는 “연구직만 얻을 수 있다면 연봉은 상관없다. 하지만 면접을 보면 ‘아이는 누가 봐줘요?’라는 질문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고 했다.

조선일보·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전국 16세 이상 남녀 178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2 대한민국 젠더 의식 조사’에서 남녀와 세대를 불문하고 한국인들이 가장 심각하다고 꼽은 젠더 문제는 여성의 경력 단절로 나타났다. ‘출산·육아로 인한 여성 경력 단절 지원 정책’에 동의한 전체 응답자 비율은 62.7%로 군인 급여 인상(59.1%)이나 군복무 가산점 제도(50.5%), 여성의 고위직 비율 확대(34.0%) 등 다른 양성평등제도보다 높았다. 남성 응답자 절반 이상(56%)도 여성 경력 단절 지원 정책에 동의했다.

여성의 경력 단절을 해결해야 한다는 데 다수의 국민이 동의하는 것은 이 문제가 성불평등이나 저출산 등 우리 사회가 당면한 최우선 과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본지 설문조사에서 ‘이상적인 자녀 수’로 과반(55.3%)의 응답자가 2명을 꼽았지만 현실에서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81명으로 절반에도 못 미친다. 원하는 자녀 수와 실제 자녀 수가 두 배 넘게 차이나는 데에는 경력 단절이 큰 영향을 미친다. 응답자의 72.2%가 여성 경력단절의 원인이 ‘출산과 육아’라는 데 동의했고, 20·30대 여성 10명 중 6명은 ‘자녀를 가지면 사회적 성취를 이루기 어렵다’고 응답했다.

경력 단절이 해결되지 않으면 남녀 고용 불평등과 임금 격차도 해소되기 어렵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100대 기업의 여성 임직원 수는 약 18만 명으로 남성 임직원 수(64만 명)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평균 임금은 남성이 9200만원, 여성이 6300만원으로 여성이 남성의 68.1% 수준이었고, 평균 근속 연수도 남성(13.1년)에 비해 여성(9.6년)이 3.5년 적었다. 김난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기업들이 출산·육아로 휴직 또는 퇴사하는 여성 채용을 꺼리는 데다, 여성들은 경력 단절 탓에 고위직으로 올라가기가 어렵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저출산은 물론, 고용 불평등, 임금 격차가 더 심각해지는 악순환에 빠질 것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