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계열사에 근무하는 8년 차 직장인 박진경(30·가명)씨는 내년 과장 진급을 앞두고 있지만 최근 ‘만년 대리’를 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했다. 동료들 모두 매달리는 승진 가점 항목인 금융 관련 자격증을 최대한 따지 않고 버텨서 승진을 하지 않거나 최대한 늦춰볼 생각이라고 한다. 그는 “과장 직급부터는 야근이 늘어나고 실적 평가를 통해 성과급 차이도 생긴다”면서 “월급은 실수령 기준으로 50만원 정도밖에 안 오르는데, 스트레스 받으면서 굳이 과장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지금처럼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해 워라밸(일과 개인 삶의 균형) 지켜가며 대리로 남는 게 속 편하다”고 했다.

임원 승진, ‘승진 코스’로 통하는 본사 기획 부서 발탁 등 많은 직장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들이, 최근 2030 직장인들 사이에선 기피 대상이 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회사에 몸 바쳐 일해 인정받겠다”는 과거 세대와 달리 “내 삶이 더 중요하다”는 젊은 세대의 직장과 일에 대한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직장에 매달려 월급 모으는 것보다, 주식·부동산 투자가 부(富)를 더 빨리 쌓을 수 있다는 판단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된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재계 관계자들은 ‘승진 기피자’가 아직 대세(大勢)는 아니지만, 젊은 직원들을 중심으로 그런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고 말한다. 현대차그룹에선 과장(책임) 되기를 거부하는 대리들을 소위 ‘진거자(진급 거부자)’라고 부른다. 노조(勞組)의 힘이 센 현대차에선 과장 승진과 동시에 노조 조합원 자격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현대차 직원 최모(34)씨는 “과장이 되면 바로 연봉제로 전환되고, 5단계 인사 고과 시스템을 적용받아 언제 구조 조정 대상이 될지 모른다”며 “그보다 조합원으로 남아 정년 보장을 받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예전엔 진급 안 하면 ‘무능력자’란 꼬리표가 따라붙었지만, 지금은 ‘본인의 선택’이라며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LG 계열사에 근무하는 김모(35)씨는 지난해 동기들이 과장으로 승진할 때 스스로 진급을 포기했다. 승진 필수 조건인 영어 시험을 일부러 보지 않고 대리로 남은 것이다. 그는 “과장부터는 해외 공장에 관리자로 파견을 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굳이 해외에 나가고 싶지 않다”며 “그냥 지금처럼 주식·부동산 투자 같은 재테크하면서 사는 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탓에 과거 ‘승진 코스’로 통했던 본사 파견 근무나 전략 기획, 인사 부서의 인기는 과거보다 떨어졌다고 한다. 이런 부서들은 일은 고돼도, 한번 들어가면 능력을 인정받아 임원을 달 수 있는 지름길로 통했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과거에는 본사에 오려고 다들 애썼지만 요즘은 은행 지점에 남아 워라밸 챙기겠다는 직원이 많아서 본사의 걱정이 크다”고 했다. 또 다른 은행권 관계자는 “요즘엔 인사철만 되면 본사 주요 부서 과장급들이 젊은 직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개별적으로 밥 사주면서 장점을 설명해야 할 때가 많다”며 “주요 부서는 과거엔 승진이 빨라 선호 부서였는데, 지금은 젊은 직원들이 승진에 큰 관심이 없다 보니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구인구직 서비스 업체 ‘사람인’이 지난달 20·30대 1865명의 ‘직장 선택 기준’을 조사한 결과 연봉(33.8%)이 1순위, 워라밸(23.5%)이 2순위였다. 커리어 성장 가능성(8.7%)은 5위에 그쳤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동 소득의 한계를 실감한 2030세대들이 각자 제 갈 길을 찾아가는 현상”이라고 했다. 그는 “승진하면서 회사에 오래 남는다고 해도 결국 그 돈으로는 제대로 된 집 하나 못 사는 세상인데 누가 자기 시간 바쳐가며 승진에 목을 매겠느냐”며 “회사는 적당히 다니고 남는 시간에 자아 실현하고 부수입을 얻어보겠다는 요즘 세대들의 선택”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