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만에 신원이 확인된 국립5.18묘지 무명열사 묘에 유족(왼쪽에서 세번째)과 송선태 5.18진상규명조사위원장(두번째) 등이 헌화하고 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공

국립5·18민주묘지에 이름 없이 묻혀 있던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1명의 신원이 41년만에 확인됐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는 15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무명열사 묘지번호 4-90번 사망자가 고(故) 신동남씨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조사위에 따르면, 1980년 당시 30세였던 고인은 그 해 봄 건축 미장 일을 하기 위해 서울에서 광주로 와 3개월 가량 머무른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에 온 날짜와 소속 등은 신씨 부모들도 모두 세상을 떠나 추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는 5월20일 기거하던 광주역 인근 여인숙에서 나갔다가 좌측 복부와 중상복부에 총상을 입었다. 이날 광주역에서는 계엄군에 의한 민간인 집단 발포가 이뤄졌고 고인 역시 귀갓길에 총을 맞은 것으로 추정됐다. 신씨는 즉시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3일간 입원을 했고 이중 이튿날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숨졌다.

그러나 22일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시내 병원의 사망자들을 모두 전남도청으로 옮겨와 안치하는 과정에서 그의 시신도 함께 옮겨졌다.

이후 신씨는 5·18 당시 구속된 이금영씨의 어머니에 의해 상무관에 안치됐다가 그 해 5월29일 망월시립공원묘지 제3묘원에 ‘이금영’이라는 이름으로 매장됐다. 하지만 6월21일쯤 이씨가 구금된 채 생존해 있음이 확인되자 신원미상으로 분류됐다.

이후 2001~2002년 광주광역시의 ‘행방불명자 소재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신원미상 11기의 유해에 대한 유전자 검사 과정에서도 그의 유해는 다른 4기와 함께 유전자가 일치하는 가족이 없어 그대로 국립5·18민주묘지에 묘지번호 4-90번에 ‘무명열사’(신원미상)로 남았다.

조사위는 지난 해 무명열사 묘에 묻힌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그를 포함한 3위의 무명열사 묘를 개장, DNA 검사를 위한 시료를 채취했다.

이번 확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시 병원 기록이다. 조사위는 적십자병원에서 사망한 22명의 명단 가운데 신씨와 비슷한 이름을 발견해 조사에 착수했다.

당시 간호사는 신씨의 이름을 ‘불상’으로 적은 다음 이후 ‘심봉남’으로 기록했다. 조사위 관계자는 “의식이 없었던 신씨를 ‘불상’으로 기록했다가 이후 의식을 찾은 뒤 이름을 물었으나 명확히 알아 듣지 못해 오탈자가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후 조사위는 행방불명 신청자 가운데 이름이 유사한 신동남씨의 동생 신모씨의 유전자를 유전자를 분석, 대조했다. 분석 결과, 23개의 유전자좌 중에서 21개의 유전자좌가 일치했고, 전남대 법의학교실의 확인 검수를 받았다.

조사위는 “부계에 의한 친족관계 여부를 확인하는 Y-STR 유전자 검사와 가족관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SNP 유전자 검사를 병행 실시한 결과, 묘지번호 4-90의 유전자와 행방불명 신고자 신동남의 유전자가 같은 아버지, 즉 부자관계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가족관계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날 발표회에 참석한 신씨의 이복동생은 “당시 12세여서 형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1993년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5·18특위가 생겼으니 행방불명자 신청을 하라’고 해 신청했으나 3차례 인정받지 못하자 가족들은 포기하고 살았다”며 “조사위가 형의 신원을 확인해준 데 감사하다. 앞으로 형을 잘 모시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