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온라인 커뮤니티 ‘보배드림’에 ‘택시 요금 안 내고 튄 거지’라는 글과 영상이 올라왔다. 인천에서 일하는 택시 기사의 아들이라고 밝힌 작성자는 “아버지가 콜을 받아 손님을 태웠는데, 목적지 근처에 다다르자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도망갔다”며 당시 택시 안의 블랙박스 영상을 함께 올렸다. 영상에는 마스크를 턱까지 내려 얼굴이 다 드러난 한 남성 승객이 찍혀 있었다. 작성자는 글 말미에 해당 남성이 택시를 부를 때 사용한 휴대전화 번호를 세 자리만 가리고 공개하며 “이 거지XX야 인생 그따위로 비루하게 살지 마라”라는 추신도 남겼다. 무임승차를 경찰에 신고해 정상적인 법 절차를 밟는 대신 인터넷 사이트에 해당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사적(私的) 보복을 가한 것이다. 이 글에는 “동영상이 영원히 퍼져서 네 자식이 봤으면 좋겠다” “관상이 과학이다” “양아치XX” 등 온갖 욕설 댓글이 달렸다.

/일러스트=이철원

지난달 28일에도 비슷한 폭로글이 이 온라인 사이트에 올라왔다. ‘KTX 무개념 햄버거 진상녀’라는 제목의 이 글은 동대구역에서 KTX에 탑승한 한 여성이 객실에서 승무원의 제지를 무시한 채 햄버거·케이크를 먹고, 이를 지적하는 주변 탑승객에게 “우리 아빠가 도대체 누군 줄 알고 그러냐, 너 같은 거 가만 안 둔다” 등 폭언을 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상황이 담긴 영상도 함께 올라왔다. 해당 글은 조회 수 13만회를 넘어섰고, 욕설 댓글도 550여 개가 달렸다. 일부 네티즌은 해당 여성의 신분 확인에 나서기도 했다. 이 여성은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비난 욕설에 두려움을 느끼고, 글을 올린 사람에게 장문의 사과문을 보냈다.

◇법보다 인터넷 폭로가 먼저

우리 사회가 법(法)보다 인터넷 폭로를 우선시하는 ‘사적 제재 공화국’이 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개인 간 갈등이나 범죄 피해를 봤을 때 경찰이나 지자체에 신고하거나 민원·소송을 제기하는 합법적 절차를 밟는 대신 인터넷 커뮤니티나 소셜미디어에 폭로하는 식으로 ‘여론 재판’에 먼저 호소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경찰 등 공적인 처벌 체계가 부실하고 신뢰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이 과정에서 대상이 된 사람은 사실관계가 검증되기도 전에 여론 재판만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보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학교 폭력 미투’가 대표적인 사례다.

사적 제재가 확산하는 것은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드는 공적 절차보다 반응이 훨씬 즉각적이고 효과도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달 20일 중학교 시절 학폭 의혹이 제기된 여자 아이돌 그룹 ‘(여자)아이들’의 수진은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의혹에 결국 지난 4일 모든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수진의 학교 폭력을 입증할 명백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의혹 제기자는 익명의 인물들이었다.

유명인이 아닌 일반인들도 여론 재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한번 ‘진상’으로 찍히면 일면식도 없는 ‘제3자’들이 집 앞에 몰려가 인터넷 방송으로 현장을 중계하고 신상을 털어 인터넷에 공개하는 등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경우도 흔하다.

◇사실 확인 없이 여론 재판 우려도

이 같은 사적 제재 움직임은 정확한 사실관계 확인 없이 한쪽의 일방적 주장에 기댄 감정적 여론 재판으로 흘러간다는 문제점이 있다. 작년 6월 디지털 교도소라는 사이트에 ‘성 착취물을 구매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이름이 올라간 한 의대 교수는 신상이 공개되면서 하루에도 수백 통의 욕설 문자를 받았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 해당 의혹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축구 선수 기성용의 초등학교 시절 학교 폭력 폭로전도 진위가 불분명하다. 온라인을 통해 처음 피해 사실을 폭로했던 측은 “분명한 증거가 있다” “조만간 증거 전체를 공개하겠다”고 반복해서 말하다가, 나중에는 “기성용 측이 소송을 제기하면 법정에서 공개하겠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었다. 사적 제재를 먼저 시도해놓고, 이후에 법정에서 다투자고 나선 것이다.

여론 재판에 의한 사적 제재는 현 정부에서 도입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확산시킨 측면이 강하다. 어떤 이슈든 정부·청와대 책임자가 해결에 나서는 식의 구조가 만들어지자, 각종 분쟁 해결 절차에 만족하지 못한 이들이 한꺼번에 몰렸다. 이들은 각자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잘못과 비리를 일방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시민들의 윤리 의식은 더 높아졌는데 기존 공적 처벌 절차가 이를 따라잡지 못하자, 사적인 제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커진 것”이라며 “정부·공권력이 이 같은 사회 변화에 좀 더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