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한 골목에 차량 한 대가 주차돼 있다. 이 골목에 다른 차량이 지나가려 진입하면 일대가 마비된다. /박종훈 기자

지난달 25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1m 폭 골목으로 한참 걸어들어가 김모(58)씨네 집 대문에 들어섰다. 대문 안쪽은 곧바로 계단이었다. 계단으로 약 4m를 올라가자 안방이 나왔다. 안방이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데도 김씨네는 매년 물난리를 겪는다. 옥상에 올라가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방이 이웃집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김씨 집이 가장 낮았다. 이웃집과 거리가 고작 30~50㎝ 정도. 김씨는 “재작년 폭우 때 옆집 지붕을 타고 내려온 물이 안방에 쏟아졌다”고 했다. 200만원을 들여 옥상 방수 코팅을 했더니 작년엔 창문으로 물이 들어왔고 배수관이 넘쳐 오수가 역류했다. 김씨는 “130만원을 들여 창문과 배수관을 고쳤더니 올해는 땅속 정화조가 내려앉아 또 400만원이 나갈 판”이라고 했다. 좁은 골목에 중장비가 못 들어와 공사비가 더 든다. 김씨 집은 1979년 지어졌다. 기자가 ‘집을 헐고 새로 지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옆집 계단참에서 듣고 있던 이웃집 할머니가 끼어들었다.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무슨 수로 집을 다시 지어? 다들 물 새고 못 살 지경인데 그냥 사는 거야.”

창신동은 2015년 ‘서울 도시재생 1호'로 지정돼 지금까지 900억원이 투입된 곳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도시재생 정책에 따라 변창흠 당시 SH(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이 구체적인 사업을 진행했다. 5년간의 도시재생은 창신동을 ‘재생’시키지 못했다. 도로를 새로 포장하고 가로등을 설치했지만, 여전히 길이 좁아서 소방차·구급차가 못 들어간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도 많지만 휠체어조차 못 다니는 골목이 많다. 견디다 못한 661가구가 지난달 30일 “우리도 아파트를 짓게 해달라”며 서울시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지난달 25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골목길 모습. 해발 125m 낙산 기슭에 자리 잡은 창신동 주택가에는 좁고 가파른 계단이 많다. /장근욱 기자

창신동 주택가는 해발 125m 낙산 기슭에 일제강점기 시절 만들어졌다. 허름한 봉제 공장들이 마을 어귀에 자리 잡은 이곳에선 자동차 2대가 겨우 지나는 길을 ‘큰길’이라 부른다. 다른 많은 골목길은 폭 1m 안팎이고, 시멘트 계단만으로 이뤄진 구간도 있다.

주민들이 낸 소송은 LH(한국토지주택공사)·SH와 공동으로 아파트를 짓는 ‘공공재개발’에 참여하게 해 달라는 행정심판 소송이다. 창신동 주민 2650가구 중 25% 명의로 공공재개발을 신청했지만, 서울시는 도시재생 지역이란 이유로 반려했다.

지난 10월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한 주택에서 불이 났지만 골목으로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해 소방관들이 호스를 끌고 계단을 올라가 불을 끄고 있다. /독자 제공

도시재생 사업은 문재인 정부가 ‘5년간 50조원 투입’을 약속한 정권 간판 주거정책이지만, 그에 앞서 서울시가 2015년부터 진행해왔다. 서울시 도시재생을 초기 진두지휘한 인물이 바로 변 내정자다. 그는 LH 사장이던 작년 11월에도 “‘도시재생 시즌2’가 필요하다”고 했다.

창신·숭인동 일대에서는 지금까지 도시재생 명목 예산 900억원이 집행됐다. 그러나 주민들은 “체감할 수 없다”고 했다. ‘성과물'이라는 전망대, 봉제 박물관, 주민복지시설, 도시재생사무실 등이 ‘주민의 삶’과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주민 박모(65)씨는 “쓸데없는 돈××”이라고 했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관제(官製) 채석장 전망대'는 텅비었지만, 그 옆 민간 투자자가 지은 카페는 낡은 동네를 내려다보려는 손님으로 북적였다. 지난달 12일 오후 옆 카페를 찾은 손님이 일대 전경을 감상하고 있다. 지난해 도시재생선도사업으로 예산 7억6000만원이 투입된 채석장전망대가 들어서면서 인근에 이 카페도 문을 열었다. /장근욱 기자

창신동 꼭대기 2층짜리 ‘전망대’를 지난달 12일 오후 찾았다. 도시재생 예산 7억6000만원을 들인 건물이다. 입구부터 사람이 단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 전망대로 올라갔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2층 카페로 내려갔더니, 손님이 없어 혼자서 휴대전화를 만지던 카페 직원이 화들짝 일어나 기자를 맞았다. 다른 시설 평가도 마찬가지다. 봉제업자 이석삼(55)씨는 “봉제 박물관이 봉제업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했다. 미용실을 하는 이모(52)씨는 “냉장고를 샀는데, 계단길 때문에 집까지 못 갖다준다더라. 예쁜 돌계단으로 바꾸면 뭐가 달라지느냐”고 했다.

낡은 동네가 ‘재생'이란 이름으로 ‘보존'되자 구경꾼을 겨냥한 투자가 벌어진다. 텅빈 ‘관제(官製) 전망대' 옆에 올해 7월 50평 규모 3층 카페가 들어섰다. 외지인이 땅을 사서 건설하고 운영하는 이 카페는 음료 한 잔이 7000~9000원으로 고가임에도 카페 안은 SNS 등을 통해 알고 찾아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원모(21∙서울 강남구)씨는 “SNS에서 보고 찾아왔다”며 “내려다보니 동네가 옛스럽고 전망이 좋다”고 했다. 카페를 방문한 권모(22∙서울 구로구)씨는 “걸어올라오는 데 힘들었지만, 오래된 주택들을 배경으로 보는 일몰이 아름답다”고 했다.

주민들은 터전을 떠난다. 창신동 인구는 2014년 말 2만4349명에서 지난달 2만386명으로 16% 감소했다. 주민 박모(37)씨는 “동네 여기저기 빈집이 늘어 아이들 키우기가 걱정된다”고 했다.

6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골목길 계단으로 한 남성이 올라가고 있다. 해발 125m 낙산 기슭에 자리 잡은 창신동 주택가에는 좁고 가파른 계단이 많다. /박종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