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이 회계 장부 등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부가 조합원 1000명 이상 노조 327곳(상급 단체 포함)에 관련 자료를 내라고 요구했지만, 63%(207곳)가 이를 사실상 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자료를 제대로 내지 않은 노조에 대해 과태료(500만원)를 부과하고, 노조 사무실 현장 조사도 할 방침이다. 앞서 한국노총·민주노총은 정부 회계 장부 제출 요구가 “노조에 대한 공격”이라며 산하 노조에 이를 거부하라는 지침을 내린 바 있다.

김동명(오른쪽) 한국노총 위원장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사무실을 예방해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뉴시스

고용노동부가 주요 노조, 상급 단체를 대상으로 노조 회계 장부 비치 의무를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1일부터 15일까지 증빙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한 결과, 327곳 중 120곳(37%)만이 요건에 맞게 문서를 낸 것으로 16일 집계됐다. 한노총 산하 173곳 중 67곳(39%), 민노총 65곳 중 16곳(25%)만이 이를 이행했다. 반면 소수 노총 또는 상급 단체가 없는 노조 89곳 중에선 37곳(42%)이 요건에 맞는 자료를 냈다.

고용부는 이번 자료 제출 공문을 보내면서 회계 관련 서류의 앞표지 1장, 속지 1장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라고 했다. 회계 관련 서류가 맞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 두 장만 내면 서류를 제대로 비치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한노총·민노총 산하 노조 238곳 중 36곳은 아무것도 내지 않았고, 119곳은 앞표지만 찍어 보냈다. 이마저도 제출 시한을 넘겨 뒤늦게 제출한 경우가 상당수였다.

노동조합법에 따르면 각 노조는 사무실에 조합원 명부와 규약, 임원 성명·주소록, 최근 3년 치 회의록 및 재정 관련 장부·서류를 둬야 한다. 조합원이 자기 노조 문서를 살펴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정부도 노조로부터 회계 결산과 운영 상황을 보고받을 수 있다. 지난해부터 노조가 조합비나 정부 지원금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 여부 등 노조의 회계 투명성에 대한 지적이 잇따르자 정부는 지난해 12월 29일 대규모 노조와 상급 단체 327곳에 공문을 보내 올 1월까지 사무실에 회계 장부 등을 비치하라고 요구했다. 현행 노조법상 노조 회계를 일반에 공개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지만, 사무실에 서류를 비치하는 것은 노조가 지켜야 할 법적 의무인 데다 이를 통해 조합원들이 자기 노조의 재정 운영을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용부는 이달 1일에는 각 문서가 제대로 비치돼 있는지 증빙할 수 있는 자료로서 앞표지와 속지 각 1장을 제출하라고 했다.

그러나 한노총 김동명, 민노총 양경수 위원장은 제출 시한 하루 전인 14일 만나 “고용부가 회계 투명성을 빌미로 노조 운영에 대한 개입을 추진하고 있다”는 입장을 냈다. 이미 산하 조직에 각 서류 앞표지만 찍어서 제출하고, 속지 사진은 “노조의 민감한 내부 정보”라며 제출하지 말라는 지침을 하달한 상태였다.

고용부는 속지 사진이 없으면 노조가 사무실에 비치했다는 회계 관련 서류가 진짜인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속지까지 내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노조가 표지만 그럴듯하게 만들어두고 내용은 부실하게 뒀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나마도 노조 사무실의 서류 비치 여부만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것일 뿐, 노조가 비치했다는 서류의 내용이 진실한지를 회계감사 등의 방법을 통해 검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양대 노총 산하 노조들이 자료 제출을 집단적으로 거부한 데 대해 고용부는 “노조의 회계 투명성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회계 투명성과 관련된 현행법 조항을 위반해 ‘깜깜이 회계’라는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고용부는 증빙 자료를 제대로 내지 않은 노조 207곳에 대해 최대 5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절차에 들어가기로 했다. 일단 오는 17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2주간의 시정 기간을 두고, 기한 내에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는 한편, 자료를 제출할 기회도 다시 한번 줄 계획이다. 이때도 응하지 않으면 다음 달 15일 이후부터 실제 과태료를 부과할 예정이다.

고용부 직원이 직접 각 노조 사무실에 가서 서류를 제대로 비치했는지 확인하는 절차도 진행하기로 했다. 고용부는 ‘질서 위반 행위가 발생했다는 합리적 의심이 있어 조사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사무소에 출입해 장부·서류를 검사할 수 있다’는 질서위반행위규제법 조항에 따라 현장 조사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노조가 현장 조사를 거부·회피하거나 방해하면 노조법 위반 과태료와 별도로 질서위반행위규제법 과태료를 500만원까지 추가로 부과할 수 있다.

그러나 한노총과 민노총은 자료 제출을 실질적으로 거부하고 현장 조사에도 응하지 않겠다는 방침이어서, 정부와 노조 간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노동계에서는 매년 수십억~수백억 원 조합비를 걷어 쓰는 대형 노조와 상급 단체들에 500만원 과태료를 매긴다고 실질적인 제재 효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가 문서 비치 요구를 할 때마다 과태료를 내고 이를 무시하거나, 과태료 부과 처분 자체에 불복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간을 끌 수 있다는 관측이다. 하지만 고용부 측은 “과태료 액수가 노조에 곧바로 실질적인 충격을 줄 수 없다고 해도, 노조 회계 투명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회계 관련 자료 미제출로 과태료 처분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노조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