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5월 1일 서울 종로구 안국역 사거리에서 경찰 버스에 진로가 막힌 시위대가 버스에 밧줄을 묶어 잡아당기자, 경찰이 살수차로 물을 뿌리고 있다. /김지호 기자

경찰이 지난해 도심 내 대규모 폭력 사태 등에 대응하기 위한 살수(撒水)차와 가스차 30대를 모두 폐차한 것으로 31일 확인됐다. 살수차는 트럭을 개조해 물대포를 장착한 차량이고, 가스차는 최루가스를 분사하는 이동식 장비다. 원칙적으로 소요 사태 등에 대응하기 위한 장비인데, 이젠 경찰에 한 대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소요 사태란 특정 지역에 법 집행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의 대규모 폭력 사태가 벌어진 것을 뜻한다. 경찰은 앞으로도 살수차나 가스차 도입 계획이 없다고 했다. 일선 경찰 사이에서는 “살수차 사용은 절제해야 하지만 아예 없애면 만일의 사태에 어떻게 대비하느냐”는 반응이 나온다. 현 정부 출범 이후 각종 불법 집회·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응해 온 경찰이 현 정부 눈치를 본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경찰청 등에 따르면, 작년 6월쯤 경찰은 전국 곳곳에 있던 살수차 18대를 모두 폐차했다. 가스차 12대도 함께 폐기했다. 경찰 관계자는 “작년 환경부에서 ‘미세 먼지 저감을 위해 보유한 경유 차량 중 사용 연한이 지난 것을 폐기하라’는 지침이 내려와, 그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살수·가스차는 경유 차량이고 사용 연한이 8~9년 정도인데 연한이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 살수·가스차를 폐기하면서 새 차는 들여오지 않았고, 앞으로 도입할 계획도 없다고 했다.

살수차와 가스차는 경찰이 대규모 폭력 시위 등이 벌어졌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 중 하나다. 현행 경찰 장비 관련 대통령령인 ‘위해성 경찰 장비의 사용 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도 살수차와 가스차가 사용 가능한 경찰 장비로 명시돼 있다. 살수차는 ‘소요 사태로 공공의 안녕질서에 위험이 초래되는 경우’ 등에 사용할 수 있고, 가스차도 ‘불법 집회 또는 소요 사태’ 때 쓸 수 있다. 독일·프랑스·터키 등에서도 과격 집회가 벌어졌을 때 살수차를 동원한다. 임준태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살수차는 시위대와 경찰의 거리를 벌려 충돌을 막아주는 장비”라며 “유럽 선진국에서도 과격 집회 시 사용한다”고 말했다. 경비 업무를 맡고 있는 한 경찰관은 “소요 사태는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인데 급박한 상황에서 살수차가 한 대도 없으면 결국엔 경찰관들이 몸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일선 경찰관들 사이에서는 경찰이 앞세운 ‘환경부 지침’이나 ‘사용 연한’은 명분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각종 불법 집회·시위에 소극적으로 대응해온 현 정부 기조에 맞춘 결과 아니냐는 것이다. 특히 살수차는 경찰이 극도로 사용을 자제하고 있는 장비다. 지난 2015년 11월 서울 도심을 난장판으로 만든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백남기씨가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10개월 뒤 사망한 사건 이후 경찰은 지금까지 살수차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2020년엔 정부가 경찰 장비 규정을 바꿔 살수차의 동원 요건 중에 ‘불법 집회·시위’를 없애고 ‘소요 사태’만 남겨 놨다. 예외적인 대규모 폭력 사태 때만 사용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모조리 폐차해 버린 것이다.

각종 불법 집회·시위를 맡아온 경찰관들은 “살수차 사용을 자제하는 것과 아예 한 대도 남기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라고 말한다. 경비 경험이 많은 한 경찰서장은 “백씨 사건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사건 하나 때문에 경찰이 당연히 보유해야 할 살수차를 없앤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며 “오히려 만일의 소요 사태가 발생했을 때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강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