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전 서울 A 고등학교에선 교과 수업 대신 ‘글씨 바르게 쓰기’ 강좌가 열렸다. 캘리그라피 강사가 1학년 학생 31명에게 “단어를 균형감 있게 덩어리 지어 쓰라”고 요령을 알려주자, 학생들은 5분간 A4 용지에 학교 교가를 써내려갔다. 집중했지만 알아보기 힘든 ‘지렁이 글씨’가 속출했다. 서로 글씨를 보며 “초딩도 이것보단 잘 쓰겠다”며 웃었다.

18일 서울 중동고 1학년 학생들이 ‘글씨 바르게 쓰기’ 수업 시간에 작성한 노트 필기(위)와 직접 쓴 교가 가사. 악필이라 알아보기가 어렵다. 손글씨에 서툰 학생들이 급증하자 이 학교는 올해 1학년을 대상으로 한글 쓰기 수업을 시작했다. /윤상진 기자

이 학교는 올해 1학년 학생 360명을 대상으로 한글 쓰기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이 디지털 기기의 ‘키보드’에 익숙해지면서 손 글씨에 서툰 학생들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명학 교장은 “디지털 시대라고 해도 글씨는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중요한 소통 방법”이라며 “성인이 되기 전에 바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학교는 7월 ‘글씨 쓰기 대회’를 열고,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수업도 검토하고 있다.

인천 만수북중 박정현 국어교사는 “10년 전엔 잘 쓰는 학생이 한 반에 3~4명은 있었지만 지금은 한 명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시험 기간이면 교사끼리 학생이 써낸 답안을 두고 어떤 글자인지 ‘토론’하는 풍경도 빈번해졌다고 한다. 서울 한 고등학교 영어 교사는 “어떤 글자인지 헷갈려서 그 학생이 이전 시험에 썼던 답안을 다시 꺼내 ‘필적 확인’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시험 때마다 ‘판독’이 어려운 글씨가 속출한다는 것이다.

17일 찾은 강남의 한 글씨 교정 학원은 5년 전보다 원생이 약 30% 늘었다고 한다. 주말이면 10평 규모 학원에 50명 이상이 몰린다. 이 학원 유성영(57) 대표는 “수행 평가가 많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글씨 연습을 시키려는 학부모 문의가 많다”고 했다. 수강생 중 여학생 비율이 10년 전엔 10명 중 1명 수준이었지만 최근엔 30% 이상이라고 한다. ‘여학생이 글씨 잘 쓴다’는 것도 옛말이다.

반면 손 글씨에 관심을 갖는 성인들은 늘고 있다. 유현덕 한국캘리그라피협회장은 “5년 전만 해도 캘리그라피에 관심을 갖는 2030 세대가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하루에 2~3명씩 수강 상담을 하고 있다”고 했다. 국가 자격증이나 행정∙외무고시 등을 준비하는 성인들도 글씨를 교정하러 학원으로 향한다. 기술사 시험을 준비한다는 임모(50)씨는 “합격자 답안지의 글씨가 가지런한 것을 보고 ‘내 글씨는 감점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3개월 전부터 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중국에서도 디지털 세대는 한자를 읽을 줄은 알지만 쓰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조사가 나왔다. 중국어 발음을 알파벳으로 입력하는 방식으로 ‘키보드’를 치다 보니 한자(간체자)를 쓰려고 하면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손으로 필기하는 것이 ‘키보드’보다 사고력 등을 더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김광준 세브란스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손으로 쓰면 기억에 오래 남을 뿐 아니라 창의력과 인내력을 길러주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