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교육청이 최근 서울 지역 모든 초·중·고교에 “학교 내 일제 잔재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제출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시교육청이 일제 잔재라고 분류한 항목엔 친일 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 구령대(口令臺), 학생생활규정 속 문구, 방위·순서 표시가 들어간 학교 이름까지 포함됐다.

◇“교가, 교명, 교표까지 조사하라”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2월 말 서울 시내 모든 학교에 공문을 보내 “학교 내 유·무형 일제강점기 식민 잔재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4월 30일까지 제출하라”고 안내했다. 욱일기와 유사한 문양의 교표(校標), 일본인 학교장 사진이나 동상, ‘동서남북'과 같은 방위나 ‘제일' 등 서열이 들어간 학교 이름도 포함했다. 일부 학교가 동요 ‘섬집아기’를 만든 작곡가 이흥렬, 소설 ‘무정’ 등을 쓴 춘원 이광수, 언론인 최남선 등 친일 의혹을 받는 문학가·음악가가 만든 교가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교체하라는 것이다. 또 학생생활규정 등에서 쓰이는 ‘반장·부반장’ ‘차렷·경례' 등 용어도 ‘친일 잔재’라는 딱지를 붙여 조사하라고 했다.

이 같은 조사 공문은 올 초 서울시의회가 통과시킨 ‘친일 반민족 행위 청산 지원에 관한 조례’ 등에 근거한 것이다. 그동안 전교조와 민족문제연구소 같은 시민단체들이 시도교육청에 “학교 내 친일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는데, 조례가 만들어지면서 법적 근거가 생긴 셈이다. 전교조 서울지부는 지난 2019년 서울 지역 초·중·고교 113곳을 지목해 “친일파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조사가 끝나면 역사학자·시민단체 관계자들로 이뤄진 ‘일제 식민 잔재 청산 추진단’을 통해 학교별로 컨설팅을 진행하고, 연말까지 작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5000만원 안팎 예산도 지원할 방침. 서울시교육청 담당자는 “강제는 아니며, 각 학교가 구성원 간 협의를 거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에만 매달리는 관제 민족주의”

문제는 서울시교육청이 ‘일제 잔재’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으로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제시했다는 부분이다. 이 사전은 백선엽 장군,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도 친일파로 규정하는 등 선정 기준이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신현욱 한국교총 정책본부장은 “친일 잔재 청산은 필요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나 평가가 부족한 상황 아니냐”고 말했다.

이른바 ‘교육계 친일 청산’은 지난 2019년 광주광역시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벌어졌다. 2019년 1월 광주교대 산학협력단이 광주광역시 의뢰로 ‘광주 친일 잔재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친일 교가 청산 작업이 시작됐고, 이후 민족문제연구소와 전교조가 달려들어 각 교육청과 학교에 친일 교가 교체 등을 요구했다. 지금까지 제주·충북·전북·인천·울산 등 많은 지역에서 교육청이 나서 친일 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전수 조사하고 바꾸도록 한 상태다. 이 과정에서 제주는 일본산 향나무 교목까지 ‘친일 잔재'로 분류해 논란이 일었고, 경기의회는 초·중·고가 보유 중인 일제 ‘전범(戰犯) 기업’ 제품에 ‘일본 전범 기업이 생산한 제품입니다’라는 스티커 부착을 의무화하는 내용 조례를 추진하기도 했다.

교육계에서는 “전체주의나 다름없는 과도한 조치”라는 의견이 나온다. 이경균 한국사립초중고등학교법인협의회 사무총장은 “학교 구성원들과 동문회에서 알아서 할 일을 관에서 바꾸라고 하는 건 ‘관제 민족주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