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이른바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1심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법원을 나오며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24.01.26 / 장련성 기자

이른바 ‘사법 행정권 남용’ 사건으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 개입’, ‘판사 블랙리스트’, ‘법관 비위 은폐’ 등 검찰이 기소한 모든 혐의가 무죄로 판단됐다. 양 전 대법원장과 함께 기소된 박병대 전 대법관과 고영한 전 대법관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이 2019년 2월 기소된지 1810일, 4년 11개월만에 1심 판단이 나온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5-1부(재판장 이종민)는 26일 열린 양 전 대법원장의 1심 선고 재판에서 직권남용 등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박 전 대법관과 고 전 대법관의 모든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선고는 오후 2시부터 4시간 25분 동안 진행됐다. 오후 4시 10분쯤이 되자 재판부가 10분간 휴정을 선언하기도 했다. 재판부가 선고 도중 휴정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9년 2월 헌정 사상 전직 대법원장으로는 처음 구속 기소됐다. 이후 1심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59개월이 걸렸다. 법정에 증거로 제출돼 재판부가 검토해야할 기록이 13만여쪽에 달했고, 전‧현직 법관과 법원 직원 등 101명이 증인으로 나왔다. 문재인 정부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 등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트럭 기소’를 한 탓이다. 법조계에서는 “애당초 문재인 정권의 눈치를 본 무리한 수사였다”는 말이 나왔다.

왼쪽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고영한 전 대법관, 박병대 전 대법관./뉴스1

◇ 재판 개입‧거래 없었다

1심 법원은 이 사건의 핵심인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재판 개입’ 혐의(직권남용)를 전부 무죄로 판단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도입 등을 위해 박근혜 청와대와 거래하려는 목적으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이나 전교조 법외(法外) 노조 소송 등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양승태 대법원에서) 청와대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재판을 활용하는 등의 방침이 확립됐다는 검찰의 주장은 인정하기 어렵다”며 “설령 직권남용이 성립하더라도 양 전 대법원장 등이 공모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인터넷 ‘댓글 조작’ 사건에 개입하려 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위법한 직권남용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사법부에 유리한 방향으로 ‘옛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관련 재판에 개입하려 했다는 혐의도 무죄로 판단됐다.

법원은 앞서 이같은 재판 개입 혐의로 기소된 판사들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다른 판사들의 재판에 개입할 직무상 권한 자체가 없어 직권남용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법리에 따른 판결이었다. 이날 재판부도 “(대법원장 등) 사법행정권자가 재판에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칠 권한이 없는 것은 명백하다”며 같은 결론을 내렸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사법농단 혐의'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법원을 나오며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뉴스1

◇ ‘판사 블랙리스트’ 등도 무죄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 등이 특정 성향을 가진 판사들을 ‘물의 야기 법관’으로 분류하고 원치 않는 곳으로 발령내는 식의 인사 불이익을 줬다는 판사 블랙리스트 혐의도 무죄로 판단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정치 성향이 담긴 글을 올리거나 ‘튀는 판결’로 사법부에 부담을 준 판사 등에게 인사 불이익을 줬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이 일부 법관에 대해 불이익한 인사 조치를 한 것은 인정된다”면서도 “전보 등 인사와 관련해 인사권자에게는 폭넓은 재량이 있고, 근무 희망지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인사 조치는 재량권 남용이나 일탈에 해당하지 않아 위법하지 않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진보 판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소모임 ‘인사모’(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의 와해를 시도했다는 혐의도 무죄로 판단됐다. 이외에도 ‘정운호 게이트’ 관련 판사 비위를 감추려고 검찰 수사 기밀을 수집하려 했다는 혐의, 공보관실 운영비를 불법 편성 및 집행했다는 혐의도 무죄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