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에서 과실치사의 인과관계 입증 기준이 민·형사 사건에서 다르게 적용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한 한 병원의 수술 장면. /조선DB

전신마취 수술 도중 환자가 사망한 사건에서 마취를 담당한 의사는 무죄를 받았지만, 병원의 배상책임은 인정됐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A씨 유족이 B 의료재단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7일 밝혔다. 반면 형사사건에서 의사에 대한 유죄 판단은 뒤집혔다. 의료 사고에서 의사의 형사적 책임이 인정되지 않더라도 병원의 과실 책임을 묻는 민사소송은 환자 피해 개연성이 증명된다면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A씨는 2015년 12월 오른쪽 어깨 회전근개파열 등으로 서울의 B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이 병원 마취과 전문의 C씨는 수술 당일 오전 10시 15분쯤 전신마취와 부분마취를 진행하고 간호사에게 상태를 지켜보라고 한 뒤 수술실을 나왔다. 이후 A씨가 저혈압과 산소포화도 하강 증세를 보이자 간호사가 C씨에게 네 차례 전화했다. 최초 전화에서 A씨는 에페드린 투여를 지시했고 두 번째 전화는 받지 않았다. 세 번째 통화를 거쳐 네 번째 전화를 받고 수술실로 돌아온 C씨는 A씨에게 혈압상승제 등을 투여했지만, A씨는 회복하지 못했다. C씨는 수술을 중단하고 심폐소생술을 시행했다. 이후 인근 병원으로 전원했지만 A씨는 끝내 사망했다. 부검으로도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A씨 가족은 B 병원을 운영하는 B 의료재단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은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C씨가 간호사 호출에 즉시 대응하지 않아 심폐소생술을 제때 못한 과실이 있다고 판단했다. 사망과 과실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도 하급심이 맞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환자는 의료행위 당시 진료상 과실로 손해가 발생했다는 개연성을 증명하면 된다”고 했다. 병원 측이 A씨 사망이 의료상 과실이 아닌 다른 원인으로 발생한 점을 증명하지 않는 이상 병원 측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의료 민사소송에서 진료상 과실이 증명된 경우 인과관계 추정에 관한 법리를 정비해 새롭게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형사사건에서는 의사 C씨에게 적용된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앞서 형사 2심 재판부는 C씨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와 의료법위반 일부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금고 8개월과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C씨가 직접 환자를 관찰하거나 간호사 호출을 받고 신속히 대응했다면 어떤 조치를 더 할 수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며 “심정지가 발생했을 때 C씨가 직접 관찰하다 심폐소생술을 했다면 환자가 사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증명도 부족하다”고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민사사건과 달리 형사사건에서는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의 증명’이 기준이고, 민사사건에서의 인과관계 추정 법리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