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법원행정처는 2019년과 2021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법원 노조)와 두 차례에 걸쳐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이 ‘단체 협약’은 이후 일선 고법·지법 등에서 추가로 만들어지는 ‘(노사) 합의안’의 기준이 됐다.

그동안 법원 내부에서는 단체 협약과 합의안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들이 흘러나왔다. 본지가 국민의힘 장동혁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단체협약서 등의 내용을 보니, 실제 법원행정처 등이 노조의 과도한 요구를 수용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뉴스1

◇'재판 행정 영향’ 논란

법원과 법원 노조가 체결한 단체 협약과 합의안은 일종의 노사 협약이다. 법원 노조는 2005년 출범했고 전국 법원에서 판사를 제외한 공무원 1만5000여 명 중 5급 이하 직원들이 가입 대상이다. 이들 중 70% 정도가 노조에 가입한 것으로 법조계에서는 추정한다. 모두 노사 간 계약이기 때문에 한번 맺은 단체 협약과 합의안은 양측이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한 일선 판사는 “단체협약과 합의안에는 노조가 법원의 고유 권한인 재판 행정에 영향을 줄 내용들이 담겨 있다”고 했다.

지난 4월 한 지방법원의 부장판사는 소속 법원에서 ‘노조와의 단체 협약에 따라 7월 정기 인사 전후로 재판 기일 지정을 자제해 달라’는 이메일을 받았다. 재판 기일은 소송 당사자들의 사정을 고려해 재판부가 정하는 것인데, 노조와의 협약을 이유로 특정 시기에 재판을 잡지 말라는 요구를 받은 것이다. 법원 직원 정기 인사는 7월쯤인데, 이때 업무 인수인계 등으로 직원들이 바쁘니 재판을 하지 말라는 게 법원 노조의 요구다. 한 판사는 “국민이 법관에게 재판받을 권리(헌법 27조)를 법원 노조가 제약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래픽=송윤혜

2019년 서울남부지법 합의안에는 ‘법원장은 분리 선고를 자제하도록 하는 조합의 요구를 재판부에 전달한다’는 내용이 있다. 분리 선고는 여러 피고인 중 일부가 재판에 출석하지 않거나, 한 피고인의 여러 범죄 혐의 중 일부에 대한 법원의 심리가 먼저 끝난 경우 재판장 판단 아래 이뤄진다. 분리 선고를 하게 되면 직원들이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을 여러 번 만드는 등 일이 많아진다는 게 법조계의 해석이다. 또 2019년 광주지법은 “법원은 경매 사건의 매각 기일 주기를 6주로 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합의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고등법원장 출신인 한 변호사는 “법원 공무원은 국민을 위한 봉사자이며 국민이 낸 세금에서 월급을 받는다”면서 “재판은 법원이 노조와 흥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노조 활동을 과도하게 보장”

2019년 단체 협약에는 ‘법원은 전문화와 신속한 노동분쟁 해소를 위해 노동 사건을 전담하는 노동법원 설치를 위해 공동 노력한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노동법원 설치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등이 주장해 온 내용이다. 한 일선 판사는 “단체 협약은 근로 조건 개선을 주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며 “사회적 합의와 국회 입법을 통해 결정해야 할 노동법원 설치를 노조와 행정처가 단체 협약에 넣은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라고 했다.

그래픽=송윤혜

작년 의정부지법이 노조와 맺은 합의안에는 ‘전(全) 직원에게 차별 없이 듀얼 모니터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듀얼 모니터는 하나의 컴퓨터에 두 개의 모니터를 쓸 수 있게 하는 것으로 판결문을 쓰는 판사들에게 제공돼 왔다. 한 부장판사는 “일반직 직원도 업무 성격에 따라 듀얼 모니터가 필요한 수 있지만 전 직원에게 ‘무차별’ 제공하라는 것은 과하다”고 했다. 또 ‘모든 법원에 남자 휴게실을 설치한다(2021년)’, ‘자녀의 군 입영 시 1일 휴무 보장 강구(2019년)’ 등도 단체 협약에 들어갔다.

법원 노조가 인사에도 개입하려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북부지법 등의 작년 합의안에는 ‘승진이 임박한 직원의 사법행정 부서 전입을 지양한다’는 조항도 뒀다. 한 법원 관계자는 “승진시험을 준비해야 하니 일이 많은 곳으로 보내지 말라는 것”이라고 했다.

이 밖에 조합원 혼사나 상사(喪事)에 대법원장이 화환이나 조화를 보내 사기 진작을 한다는 내용을 비롯해 ‘(법원) 구내식당 입구에 노조 홍보 공간을 마련하고 주 2회 실시하는 노조 아침방송을 위해 방송 시설을 제공한다’ ‘조합이 현수막을 걸 수 있는 거치대를 조합원과 국민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설치한다’ 등의 조항도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