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혀 북한에서 수십 년간 강제 노역을 한 국군 포로들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등을 상대로 낸 2건의 손해배상청구 소송 중 하나가 1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소송 결과를 기다리던 고령(高齡) 국군 포로 5명 가운데 2명은 그사이 세상을 떠났다. 법조계에서 “다른 국군 포로가 같은 구조의 재판에서 최종 승소한 이후 제기된 소송인데 재판이 늘어지는 이유가 석연치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단법인 물망초 소속 국군포로송환위원회가 2019년 6월 2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판에 앞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연합뉴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작년 9월 이원삼(당시 95세)씨 등 탈북 국군 포로 5명은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이 강제 노역으로 인한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배상하라”며 1인당 2100만원씩 총 1억500만원의 손배소를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법조계에서는 “이씨 등이 재판에서 어렵지 않게 승소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국군 포로들이 본 피해가 명백했고, 이들이 소송을 내기 두 달 전인 작년 7월 한재복씨 등 다른 국군 포로 2명이 북한을 상대로 낸 손배소 1심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그 재판은 북한이 항소를 안 해 4200만원을 배상하라는 1심이 그대로 확정됐다. 후속 절차로 국내 민간단체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이 보관 중인 북한 저작권료 23억원에서 배상금을 확보하려는 추심 절차와 관련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씨 등 5명은 한씨가 승소 판결을 받은 것을 보고 재판을 시작했다. 이씨는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이틀 앞두고 동부 전선에서 포로로 붙잡혀 2004년 탈북하기 전까지 51년간 함경북도 고건원 탄광 등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함께 소송을 낸 남모(당시 91세)씨는 1953년 포로로 붙잡힌 뒤, 평안북도의 광산 등에서 51년간 광부로 일해야 했다. 소송을 같이 낸 다른 3명도 비슷한 일을 겪은 국군 포로이며 현재 88~91세의 고령이다. 그들 중 이씨는 지난 7월, 남씨는 지난 5월 결과를 못 보고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이 사건 재판부는 재판 진행을 위해 필요한 ‘공시송달’을 1년째 미루고 있다. 공시송달이란 이 사건처럼 각종 재판 서류를 상대방(북한)에 전달하기가 곤란한 경우, 관보 등에 이를 실어 전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다.

이씨 등은 소송을 제기한 작년 9월 소장(訴狀)을 북한에 공시송달 해달라고 신청했고, 지난달에도 재차 신청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뚜렷한 이유 없이 아직 공시송달을 하지 않고 있다. 한 재경 지법 판사는 “공시송달은 요건만 맞으면 바로 진행해야 하는데 1년이나 미루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내용이 비슷한 다른 재판과 비교해서도 지나치게 오래 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전쟁 납북자 가족이 북한을 상대로 5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했던 소송의 경우, 18일 만에 공시송달이 이뤄졌고 3개월 만에 납북자 가족의 손을 들어준 1심 판결이 나왔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북한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본 국군 포로들은 고령일 수밖에 없다”면서 “가능한 한 빨리 소송을 진행해 생전에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