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오후 1시, 경북 안동시 정하동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엔 20여 명의 남녀 학생들이 반반씩 섞여 축구, 배구 등을 하고 있었다. 전교생 817명인 이 학교는 올해 입학생 100명 가운데 여학생(57명)이 남학생(43명)보다 더 많은 여초(女超) 현상이 나타났다. 학교 관계자는 “안동은 2000년대까지만 해도 남아 선호가 강했던 곳”이라며 “2010년대 들어 여아 비율이 꾸준히 늘더니 마침내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고 했다.

안동시는 홈페이지에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首都)’라고 시(市)를 소개한다. 유교 문화, 보수적 색채가 짙고 ‘남아 선호’ 사상도 강했던 곳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30여 년 전인 1990년 안동을 포함한 경북의 출생 성비(性比)는 130.6으로 전국 최고였다. 여아가 100명 태어날 때, 남아는 130명씩 태어났단 뜻이다. 1990년 당시 대구(129.8)가 2위였고, 그해 전국 평균은 116.5였다. 통계청 출생 성비 조사는 전국 17개 광역시·도 단위로만 집계한다.

경북 안동시 정하동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여학생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다. 전교생 817명인 이 학교엔 올해 남학생(43명)보다 여학생(57명)이 더 많이 입학했다. /신현종 기자

그런 안동에 최근 확연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올해 8월까지 안동시 월별 출산 통계에서, 1·3·4·7월에 여아가 남아보다 더 많이 태어나는 ‘역전’ 현상이 발생했다. 올 들어 8월까지 안동에서 태어난 아기는 총 511명으로, 남아(260명)와 여아(251명)의 격차가 9명에 불과하다. 2016년만 해도 이 격차는 79명이었는데 점차 줄어 지난해 18명까지 떨어졌고, 올해는 한 자릿수가 된 것이다. 안동시 관계자는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올해 연간 기준으로도 여아 출생이 남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이런 변화는 남아 선호 현상이 점차 사라지는 것과 관련돼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남녀 출생 성비는 104.8로, 1990년(116.5) 사상 최고치를 찍은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통계청이 분석한 정상 범위(103~107명)에 안착한 것이다. 최근 주변에선 ‘딸 낳는 한약’을 찾는 이들이 생길 만큼 ‘여아 선호’ 현상이 감지될 정도다. 인구학 전문가인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남아 선호 현상이 강한 국가들 중 30년 만에 이처럼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한국에서 유교 문화가 가장 강한 지역으로 꼽히는 안동의 ‘출생 성비’ 변화는 상징적이다. 경북 안동시 송현동에 사는 임모(69)씨는 “옛날에 안동에서 첫째가 딸이면 ‘아들 낳는 약’을 달여 와 며느리 먹였고, 둘째까지 딸이면 ‘보따리 싸라’고 했다”며 “이젠 안동 시내를 다녀봐도 딸아이 손잡고 다니는 부모들이 훨씬 많고, 주변을 봐도 할아버지·할머니한테 애교 부리며 살가운 손녀 둔 친구들이 부럽더라”고 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출생 성비 변화의 이유는 복합적이다. 한 여성이 평생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아기 수를 뜻하는 합계출산율이 1명도 채 안 되는(0.84명) 현실, 대(代)를 잇는다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젊은이들의 사고 방식,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

안동의 유교 문화권 인사들도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15대 종손(宗孫)인, 안동 충효당(忠孝堂) 주인 류창해(65)씨는 “2008년도 호주제 폐지 전까지만 해도 아들이 없으면 먼 친척한테 양자(養子)를 들여서라도 대를 이으려는 가족이 많았다”면서 “이젠 양자를 들여도 족보에 올린다는 명분만 있지 제도적인 효력은 없다 보니, 대를 잇는다는 의미 자체가 희미해지고 남아 선호도 자연히 사라져가는 것 같다”고 했다. 경북유교문화원 이재업(69) 이사장은 “아직 조부모 세대에겐 남아 선호 사상이 약하게 남아 있다”면서도 “출산율 자체가 워낙 낮으니 ‘아들딸 구별 않고 하나만 낳겠다’는 자식들에게 ‘손자가 갖고 싶다’는 이야길 꺼내기가 참 조심스러워졌다”고 했다.

안동시 풍천면에 사는 박정곤(46)씨는 딸 둘(15·10세)에 아들(13세) 하나, 세 남매를 뒀다. 그는 “과묵한 아들도 좋지만, 손잡고 산책하며 학교나 일상 얘기를 들려주는 딸들 덕분에 가정 분위기가 화목해지는 것 같다”며 “목요일 저녁마다 딸 둘 손을 잡고 마트에 장 보러 가는 게 일상의 낙(樂)”이라고 했다. 박씨는 최근 출생비 변화에 대해 “사람들이 가부장적인 안동에서 자란 보상 심리로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것 같다”며 “‘딸이란 확신만 있으면 더 낳겠다’는 친구가 있을 정도로, 또래 친구들 절반 이상이 딸을 선호한다”고 했다.

이 같은 현상은 전국 곳곳에서 나타난다. 서울 서초구 한 백화점의 아동용품 매장에 진열된 가방 25개 중 남아용 가방은 2개에 불과했다. 매장을 운영하는 장모(53)씨는 “한 3~4년 전만 해도 남아용, 여아용 제품을 반반씩 진열했는데 요샌 여아용을 더 많이 둔다”며 “실제 판매량이나 매출로 봐도 여아용 제품이 80%가량을 차지한다”고 했다.

인터넷 맘카페·육아 커뮤니티에는 “하나만 낳고 싶은데 딸 낳는 법 알려주세요” “딸 낳는 법 실행 성공 후기”와 같은 글들이 인기리에 공유되고, 중년층은 카카오톡으로 ‘어느 요양병원 의사가 썼다는 글’을 주고받는다. “요양병원 면회 와서, 서 있는 가족의 위치를 보면 촌수(寸數)가 딱 나온다. 침대 옆에 바싹 붙어 눈물 콧물 흘려가며 챙기는 건 딸, 그 옆에 어색하게 서 있는 이는 사위, 문간쯤에 서서 먼 산 보고 있는 사람은 아들, 복도에서 휴대폰 만지작거리는 이는 며느리”란 내용이다. 다소 과장됐지만 ‘나이 들어 부모 챙기는 건 딸뿐’이라는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한 글이다.

가장 변화를 크게 느끼는 것은 산부인과다. 김동석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회장은 “요즘 병원 찾는 부부들은 첫아이부터 딸을 바란다고 말한다”며 “둘째도 ‘자매라면 더 좋다’며 딸을 바라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부산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신모(34) 부원장은 “건강하게 아이 낳고 싶다고 한약을 지어 가는데, 요새는 ‘딸 낳는 한약’이 있느냐고 묻는 부모들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