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방송된 미국 NBC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에서 배우 마이키 데이(왼쪽 사진 가운데)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으로 분장한 채 이틀 전 바이든의 국정 연설 장면을 흉내 내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코미디언 존 디 도메니코가 최근 소셜미디어 틱톡에 올린 영상의 한 장면.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 분장을 한 도메니코는 영상에서 트럼프가 좋아한다고 밝힌 감자칩을 들고 트럼프의 표정과 몸짓을 따라했다. /유튜브·틱톡

“오늘 박수가 무지하게 많이 나올 예정입니다. 커밀라, 오늘 하체 운동 건너뛰지 않았죠? 이제부터 계속 앉았다 일어났다 하세요.” 9일 미국 NBC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인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7일 국정 연설 장면과 똑같은 세트가 등장했다. 바이든으로 분장한 배우 마이키 데이가 연단에서 과도하게 큰 목소리로 소리치자 커밀라 해리스 부통령으로 꾸민 코미디언 펑키 존슨이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다. 올해 국정 연설에서 ‘안 늙음’을 과시하려는 듯 지나치게 높은 어조로 소리치던 바이든, 그의 뒤에 앉아 연설 말끝마다 일어나 박수를 날린 부통령을 동시에 비꼰 것이다.

11월 대선이 바이든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대결로 확정된 가운데, 선거 열기가 고조되면서 ‘정치 패러디의 시간’도 돌아왔다. 정치 풍자가 조심스러운 한국과 달리 미국에선 전·현직 대통령의 각종 발언과 의혹을 패러디하는 데 거침이 없고 그 과정에 정치 성향을 드러내도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를 자유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절대 가치로 여기는 미국에서 신랄한 정치 풍자는 ‘권력을 유머로 견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계속 만들어냄으로써 유권자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도록 하는 순기능도 한다. 이런 패러디에 정치인들은 화내지 않되 대범하게 받아치고, ‘자학 개그’나 ‘셀프 패러디’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일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안 그래도 대선 시즌은 정치 패러디의 ‘대목’으로 꼽히는데, 이번 시즌엔 캐릭터가 확실한 바이든과 트럼프가 후보로 나와 일찌감치 풍자물이 쏟아지는 중이다. 4년 전보다 영향력이 세진 소셜 미디어가 이런 패러디물의 확산에 일조하고 있다. SNL 등은 방송된 모든 내용을 무료로 유튜브에 공개한다.

미 대통령 국정 연설 직후 주요 코미디 프로그램들은 바이든을 집중적으로 풍자했다. CBS의 간판 토크쇼인 ‘레이트쇼’ 진행자 스티븐 콜베어는 8일 “폴리티코(정치 전문 매체)가 바이든이 점심으로 치킨을 먹었다는 놀라운 특종을 했다”고 입을 연 후 10분에 걸쳐 바이든을 ‘저격’했다. “입구로 바이든이 들어서자 지지자들은 ‘4년 더! 4년 더!’라고 외쳤죠. 입구에서 연단까지 걸어가는 데 4년 걸린다는 소리 맞죠?” 연설 내용보다 그의 활력에 더 큰 관심을 쏟았던 언론, 바이든이 연단까지 가며 오만 사람과 ‘셀카’를 찍느라 엄청나게 느리게 걸어간 상황 등을 비꼰 것이다.(원래 ‘4년 더’는 지지자들이 4년 임기를 한 번 더 하자는 의미로 외치는 구호다.) 영상은 유튜브에 올라온 지 사흘 만에 조회 수가 250만회가 넘었다.

9일 방송된 미국 NBC 방송의 예능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에서 할리우드 스타 스칼릿 조핸슨이 공화당 소속 케이티 브릿 상원 의원의 이틀 전 연설 모습을 따라 하고 있다. 브릿은 7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국정 연설 직후 반박 연설자로 나서 어색한 표정·몸짓, 사실 관계 오류 등으로 뭇매를 맞았는데, 조핸슨은 브릿이 입었던 녹색 의상을 입고 방송에 나와 브릿의 반박 연설을 풍자했다. /X(옛 트위터)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들까지 바이든·트럼프 패러디에 뛰어든 것은 이번 대선에서 보이는 변화다. 특히 미 정치권이 “공산당이 조종하는 도구”라며 한목소리로 비판해온 중국계 기업 바이트댄스의 자회사 ‘틱톡’을 중심으로 정치 패러디물이 확산하고 있다. 트럼프를 흉내 내는 코미디언 존 디 도메니코의 팔로어는 590만명이 넘고, 짧으면 10초 길어도 1분이 넘지 않는 짧은 영상 콘텐츠는 조회 수가 많게는 6500만회에 이른다. 또 다른 인플루언서인 카일 더니건은 “긴급한 메시지”라면서도 말하는 속도에 여유가 너무 넘치는 바이든을 연기해 인기를 끌고 있다.

무관심보다는 욕을 먹더라도 화제에 오르길 바라는 정치인들은 이런 패러디를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다. 특히 틱톡은 미국 내 사용자가 약 1억7000만명이고, 이른바 ‘Z세대’라 불리는 10~20대 유권자들이 정치 뉴스를 소비하는 주요 채널이다. 청년층 표심에 소구하려는 후보 입장에선 자신을 풍자·조롱하는 내용일지라도 계속 노출되고 이들과 접점을 넓히는 것이 나쁠 게 없다. 보안을 우려하며 중국계인 틱톡에 대한 금지법까지 추진 중인 미 의회의 기조와는 상반되는 반응이다. 미 정치권 관계자는 “두 후보가 중국을 때리면서도, 정치 패러디의 홍수 속에 막상 없애자니 아쉬워하는 ‘틱톡 패러독스(paradox·역설)’에 직면한 것 같다”고 했다. 바이든·트럼프는 중국을 비난해온 평소의 기조와 달리 틱톡에 대해서만큼은 말을 아끼고 있다. 바이든은 지난달 틱톡 공식 계정까지 개설한 판이다.

이번 국정 연설 이후 조롱용(用) 소재로 가장 인기를 끄는 의외의 인물은 바이든 국정 연설에 ‘반박 연설’을 맡았던 공화당의 케이티 브릿 상원의원이다.(미 국정 연설 뒤엔 관례적으로 야당 연사가 반박 연설을 한다.) 브릿의 연설은 어색하고 과장된 감정 표현에 내용 오류까지 겹치며 비판을 받았다. 9일 방송된 SNL에선 할리우드 인기 여배우인 스칼릿 조핸슨이 깜짝 등장해 브릿을 풍자, 큰 화제가 됐다.

조핸슨은 브릿과 똑같이 녹색 의상을 입고 천연덕스럽게 “내가 지금 말하는 사례는 모두 진실이다. 연도·장소 그리고 어느 정부 때 일인지만 빼고”라고 해서 폭소를 유발했다. 브릿은 바이든 정부의 이민 정책을 비판하며 멕시코 갱단에 의한 납치 사례를 들었는데 이 사건이 사실은 공화당인 조지 W 부시 정부 때 일어났고, 납치된 장소도 미국이 아닌 멕시코였다고 드러난 것을 비꼰 것이다. 조핸슨의 영상은 하루 만에 유튜브 조회 수가 400만이 넘었고, 여기엔 “브릿이 연기한 브릿보다 더 브릿 같다”고 통쾌해하는 댓글들이 많이 달렸다. 조핸슨은 2017년에도 트럼프 장녀인 이방카로 분장해 SNL에 출연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