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3일 승리한 공화당 두 번째 경선 지역 뉴햄프셔주(州)는 인구 130만명에 불과해 전체 경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다. 그러나 표심(票心)을 초기에 확인할 수 있어 ‘대선 풍향계’로 불려왔다.

트럼프가 압승을 거뒀던 첫 번째 경선 아이오와 코커스(당원 대회·15일) 때는 외곽 지역의 이른바 ‘성난 백인들’이 그의 승리를 이끌었었다. ‘성난 백인들’은 블루칼라(생산직 노동자) 백인 남성 유권자로 미국 진보 진영의 이민 확대 및 유색인종 우대 정책, 성소수자 권리 증진 등에 반감을 가진 그룹을 뜻한다. 이와 함께 강성 보수 성향의 복음주의 기독교 지지층도 두터워 트럼프로 지지세가 쏠렸었다.

이와 달리 뉴햄프셔주는 아이오와와 비교해 종교색이 옅고 온건·중도파가 많아 헤일리에게 유리하다는 예측이 많았다. 뉴햄프셔 주정부에 따르면 지금까지 올해 작년말 기준으로 대선에 유권자 등록을 마친 이들은 약 87만3000명이다. 이 중 공화당 지지자 27만명, 민주당 26만2000명으로 엇비슷한 반면 무당파는 34만명으로 39%를 차지한다. 이 때문에 무당파의 선택이 이번 선거 결과를 좌우한다는 분석도 나왔었다. 이런 점을 노려 헤일리는 다른 경선 지역보다 뉴햄프셔에 활동을 집중해왔다. 아이오와 코커스 승리 이후부터 전날(15~22일)까지 8일간 트럼프는 뉴햄프셔에서 9차례의 유세를 했다. 이에 비해 같은 기간 헤일리는 25회로 트럼프 유세의 3배 가까이 유세 활동을 집중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세론을 뒤집지는 못했다.

공화당 대선 후보이자 전 유엔 대사인 니키 헤일리가 23일(현지 시간) 뉴햄프셔주 콩코드에서 열린 시계 파티에서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결과가 나온 후 연설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선거 다음 날인 24일 오전 0시30분(미국 시각) 기준으로 트럼프는 54.5%의 득표율을 얻어 헤일리(43.6%)를 10.9%포인트 앞서고 있다. 미 언론들은 뉴햄프셔주 압승의 기준으로 10%포인트 차 승리를 제시해왔다.

트럼프가 다시 한번 헤일리를 꺾은 데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열성 지지층 비율이 헤일리를 지지하겠다고 나선 무당파 비중을 능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헤일리를 지지하는 ‘고소득·고학력 백인’ 그룹보다 트럼프를 열렬히 지지하는 ‘백인 블루칼라(생산직 노동자)’들의 투표율이 더 높았다는 분석이다.

지난 20일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의 후보 사퇴도 ‘트럼프 대세론’에 불을 지폈다는 평가다. 이날 투표소에서 트럼프를 찍었다는 제인 밀러(64)씨는 “헤일리와 트럼프 중 끝까지 고민했다”면서도 “미국을 위기에 빠뜨린 국경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선 터프한 사람이 필요하다. 역시 마지막엔 든든한 사람을 찾게 돼 있다”고 했다.

헤일리가 대선 후보로서 트럼프와 충분히 차별화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인 데리에서 만난 50대 스카티씨는 “헤일리는 트럼프의 대안이 되겠다고 하지만 제대로 된 ‘펀치’는 못 날리고 내내 ‘나이 문제’ 같은 ‘잽’만 날렸다”며 “지금 미국이 불법 이민, 중국의 마약 침공 등으로 몰락 중인데 그렇게 발언이 미지근(tepid)해서야 지지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미 현지 언론들은 “헤일리는 유세 내내 트럼프의 내란 선동 혐의 등 ‘사법 리스크’ 등에는 한 마디 하지 않는 등 그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데 몸을 사렸다”고 했다.

23일 치러진 미국 공화당의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뉴햄프셔주 내슈아의 나이트 파티 행사장에 모인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트럼프가 워싱턴 정가 정치인들과 주요 관료들의 지지를 끌어모으면서 세를 과시한 반면, 헤일리는 ‘반(反)트럼프’ 진영을 규합하는 데 실패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이후 경선 후보였던 사업가 출신 비벡 라마스와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등은 줄줄이 사퇴하면서 ‘트럼프 지지’로 돌아섰다. 뉴햄프셔 공화당 관계자는 “반면 헤일리 주위엔 아무도 없다”며 “트럼프가 다시는 대통령이 되면 안된다고 주장했던 리즈 체니 전 하원의원, 래리 호건 전 메릴랜드 주지사, 폴 라이언 전 하원의장 등 공화당 내 굵직한 ‘반트럼프 리더’들이 팔짱을 끼고 헤일리 지지에 나서지 않는 걸 보라”고 했다.

다만 이날 헤일리가 이날 40%가 넘게 득표를 했다는 점에서 ‘반등’의 기회가 있다는 전망도 일각에서 나온다. 헤일리가 트럼프와 계속 경쟁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보일 경우 헤일리에게 추가 정치 자금 등이 몰리고, 숨통이 트인 헤일리가 트럼프의 ‘독주’에 균열을 낼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다. AP는 “특히 트럼프가 본선에 진출할 경우 중도층의 지지를 받기 힘들다는 점을 헤일리가 본격적으로 제기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다음 격전지는 한 달 뒤인 다음 달 24일 공화당 프라이머리가 열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다. 이 곳은 헤일리가 8년간 주지사를 지낸 ‘정치적 고향’이다. 만약 트럼프가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도 큰 격차로 승리할 경우 헤일리가 버티기 힘들 것이란 전망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