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AP=연합뉴스) 27년 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한 패션 칼럼니스트 E. 진 캐럴(79)이 9일(현지시간) 재판에서 승소한 뒤 뉴욕 맨해튼 연방법원을 나서며 활짝 웃고 있다. 이날 배심원단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캐럴을 성추행했고, 혐의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해 모두 500만달러의 피해보상과 징벌적 배상을 명령하는 평결을 내놨다.

도널드 트럼프(76) 전 미국 대통령이 약 27년 전 성범죄 의혹에 대한 민사소송에서 패소해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줄 가능성이 커졌다. 평결은 성범죄 자체보다, 그 후 피해자의 폭로를 ‘정치적 사기극’으로 헐뜯으며 2차 가해를 한 명예훼손 관련 배상액을 더 크게 책정했다. 정치인 등 공인(公人)의 거짓 막말이 피해자, 나아가 사회 전반에 끼치는 악영향을 무겁게 처벌한다는 재판부의 의지가 평결에 담겼다.

뉴욕남부연방지방법원 배심원단은 9일(현지 시각) 전직 잡지 칼럼니스트인 E. 진 캐럴(79)에게 트럼프가 가한 1996년쯤의 성추행 사건, 이와 관련해 지난해 발생한 명예훼손 행위에 대해 총 500만달러(약 66억원)를 지급해야 한다고 평결했다. 캐럴이 제기한 민사소송의 발단은 성추행이었지만, 명예훼손에 대한 배상액이 더 크게 책정됐다. 500만달러 중 200만달러가 성추행에 대한 배상이고, 징벌적 배상으로 2만달러가 책정됐다. 명예훼손 배상액은 성추행보다 3분의 1가량 많은 270만달러였다. 이에 대한 징벌적 배상액은 28만달러로, 성추행의 14배 수준이었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불법행위가 과중하고 재산상 손해 외에 피해자가 받은 충격과 고통이 크다고 판단될 때 부과하는 징벌이다. 비슷한 행위를 다시 저지르지 못하게 일벌백계하는 의미가 있다. 트럼프 측은 판결 직후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987년 부동산 사업가였던 도널드 트럼프(뒷모습)가 유명 잡지 기자이자 칼럼니스트였던 E 진 캐럴(트럼프 뒤에 얼굴이 작게 보이는 여성)과 뉴욕의 한 행사장에서 만나 대화하는 모습. 트럼프가 9년 뒤인 1996년 캐럴의 성폭행 혐의 제기에 "만난 적도 없다"고 하자, 캐럴이 2019년 뉴욕매거진 등을 통해 공개한 사진이다. /뉴욕매거진

캐럴은 “1995년 가을 혹은 1996년 봄 뉴욕 맨해튼 5번가의 고급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에서 사업가 트럼프와 마주쳤는데, 그가 ‘여자 선물을 골라달라’며 속옷 매장 탈의실로 이끌고서 성폭행했다”고 주장했다. 캐럴은 이후 20년 넘게 침묵하다가 “2017년 미투(성폭력 고발) 운동에 용기를 냈다”며,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2019년 이를 뉴욕매거진 기고로 공개했다. 지난해 뉴욕주가 성폭력 사건의 (민사)소멸시효를 1년간 전면 해제해 제소가 가능해졌다.

캐럴은 트럼프가 지난해 10월 전용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에 “그녀의 주장은 날조·거짓말” “정치적 마녀사냥”이라고 하자 이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도 함께 제기했다. 트럼프의 공격적 막말은 이후 계속 쏟아졌다. “생판 모르는 여자”라고 하고 “내 타입이 아니어서 성폭행했을 리가 없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성희롱일 수 있는 주장까지 했다. 트럼프 변호인까지 가세했다. 공판에서 “왜 정확한 연도도 기억 못 하나” “왜 소리 지르며 저항하지 않았나” “왜 즉시 경찰에 신고 안 했나” “’어프렌티스(2000년대 트럼프의 리얼리티 TV쇼)’ 애청자 아니었나”라면서 이른바 ‘피해자다움’을 들어 캐럴을 공격했다. 권력과 지위를 가진 이들의 성폭력을 정면 고발하기 쉽지 않은 사회적 환경에서 이처럼 피해자의 행실이나 외모, 정치적 배경 등을 들어 역공하는 것은 2차 가해의 전형적 수법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극우 음모론 사이트 '인포워스' 운영자이자 트럼프 지지자인 알렉스 존스가 2012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참사 희생자들을 악의적으로 모욕한 혐의로 지난해 코네티컷주 대법원에서 명예훼손 관련 재판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명예훼손 징벌적 배상으로만 4억7300만달러(6265억원)를 선고받았다. /로이터 연합뉴스

배심원단은 캐럴과 트럼프가 대화하는 1980년대 사진, 캐럴의 일관된 사건 묘사, 당시 그의 긴급 전화를 받고 “유명인 고소해 봤자 너만 손해”라고 조언한 친구 등 증인 11명의 증언 등을 근거로, 캐럴이 ‘성폭행(sexual assault)’을 당했다고 볼 소지는 충분하다며 원고 일부 승소 결정을 내렸다. 다만 트럼프의 행위가 ‘강간(rape)’이었는지에 대해선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 인정하지 않았다. 캐럴은 이날 활짝 웃으며 “잃어버린 내 인생을 일부라도 돌려받았다”며 “이 승리는 성폭행을 당하고도 남들이 믿어주지 않아 고통 겪는 모든 여성을 위한 승리”라고 말했다.

미 사법 체계는 악의적 거짓말과 선동, 2차 가해에 대해 중형에 큰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물리고 있다. 2012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로 숨진 어린이들을 놓고 “총기 규제 입법을 위해 벌이는 연극”이라며 피해자 생존설을 주장해 떼돈을 번 극우 음모론가 앨릭스 존스는 텍사스 법원에서 손해배상 411만달러(약 54억원), 그리고 징벌적 배상으로 그 10배가 넘는 4520만달러(약 599억원)를 유족에게 지급하란 평결을 받았다. 코네티컷주에선 징벌적 배상액만 4억7300만달러(약 6270억원)가 나왔다.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은 자신의 성추행·성폭행을 고발한 여배우 80여 명에 대해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 “내가 희생자”라며 버티다 뉴욕에서 23년형, LA에서 16년형을 선고받고 손배소를 낸 이들과 4400만달러(약 583억원) 지급에 합의하기도 했다.

한편 트럼프의 재판을 담당한 루이스 캐플런 판사는 배심원들이 트럼프에게 ‘언어 폭탄’으로 공격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배심원단의 이름을 비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재판이 끝나고 나서도 배심원들에게 재판 참여 사실을 되도록 밝히지 말라고 당부했다. 트럼프의 공개적 언어폭력이 일반인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음을 우려해 내놓은 조치다. 전직 모델 등에게 성관계에 대한 입막음 돈을 지급한 것과 관련한 혐의로 트럼프를 기소한 뉴욕 검찰은 당시 “트럼프는 자신과 반하는 증인·배심원·판사 등을 공격해 위험에 빠뜨리는 데 대한 독보적인 전력(前歷)이 있는 인물”이라고 지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