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바닷속에서도 도청하고, 우주에서도 도청한다.” 최근 소셜미디어에 유출된 미국 기밀 문건에서 한국 국가안보실 회의를 그대로 엿들은 듯한 대목이 발견되자 미국의 도청 역량에 대해 외교가에 새삼 떠도는 말이다. 적국과 우방을 가리지 않는 미국의 전방위적 도청은 과거에도 이미 여러 차례 드러나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은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며 도청 문제에 대처해 왔다.

미국의 과학기술 월간지 '와이어드' 2014년 9월호 표지에 실린 에드워드 스노든 전 미 국가안보국(NSA) 직원. 2013년 미 NSA의 도청 의혹을 폭로한 그가 성조기를 안고 찍은 이 사진은 러시아 망명 중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와이어드

미국은 냉전 시대부터 최근까지, 해저 케이블을 통해 오가는 통신을 도청하고 우주의 정찰 위성망을 통해서도 메시지를 포착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초소형 도청기나 해킹된 스마트폰, 레이저 빔 등을 이용한 통상 도청 수단이 아니더라도 타국의 통신 내용을 가로챌 수단을 국가 차원에서 전방위적으로 구비한 것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기밀 문건에는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포탄을 수출해 달라는 미국 요청을 받고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비교적 상세히 서술돼 있다. 한국 당국자들의 대화를 어떤 형식으로건 도청하지 않으면 알아내기 어려운 내용이다. 실제로 문서엔 그 출처가 ‘신호 정보(signals intelligence)’라고 적혀 있다.

흔히 ‘시긴트(SIGINT)’라고 부르는 신호 정보에는 레이더나 무기 체계에서 발생하는 신호를 분석해 얻은 정보도 포함되지만, 첩보 대상 간 대화나 통신 내용을 가로채 얻은 통신 정보를 주로 가리킨다.

지난 3월 10일 미 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 나온 미국 정보수장들. 에이브릴 헤인즈 국가정보국장(가운데), 크리스토퍼 레이 FBI 국장(오른쪽), 윌리엄 번스 CIA 국장(오른쪽 두번째), 폴 나카소네 국가안보국(NSA) 국장(왼쪽 두번째), 스콧 베리에 국방정보국(DIA) 국장(왼쪽)/EPA 연합뉴스

미국에는 독립적 정보기관인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정보국장실(ODNI)을 포함해 정보기관이 모두 18곳 있다. 이 기관들이 저마다 목표를 내세워 각각 정보를 수집하는 상황이다. 가장 적극적인 기관은 국방부 산하 국가안보국(NSA)이다. NSA에서 계약직 직원으로 일했던 에드워드 스노든은 2013년 NSA가 전 세계 각국을 오가는 전화와 이메일 등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수집해 분석하는 ‘프리즘’이란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프리즘은 구글, 애플,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대기업의 서버에도 접근해 민간인을 포함한 사용자 정보를 수집·분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노든의 폭로를 계기로 NSA가 최소한 35국 정상의 전화를 도청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줬다. 특히 동맹국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당시 총리의 휴대전화 등을 10년 이상 도청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도청이 드러난 후 메르켈이 직접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로 항의하고, 독일 외교부는 주독 미 대사를 불렀다.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을 포함한 38국의 주미 대사관을 미국이 도청해 왔다는 폭로도 이때 나왔다.

2014년 오바마 행정부가 ‘미국과 가까운 동맹·우방 정상은 도청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이후에도 실질적 변화는 없었다. 오바마는 당시 NSA의 정보 수집을 제한하는 개혁안을 발표하긴 했지만 “설득력 있는 국가 안보 목적이 있지 않는 한” 우방과 동맹국의 통신은 모니터하지 않겠다고 단서를 달았다. 안보를 위해선 도청이 가능하다는 여지를 남긴 것이다.

2015년엔 폭로 전문 매체 위키리크스의 기밀 문건 공개로 NSA가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수아 올랑드 등 프랑스 대통령 3명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나 프랑스가 주프랑스 미 대사를 불러들이는 사태로 번졌다. 2016년엔 NSA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 세계 정상들의 사적 대화를 도청한 사실이 폭로됐고, 2021년엔 NSA가 덴마크 정보 당국과 합작해 해저 광케이블을 오가는 통신을 도청한 사실도 알려졌다. 프랑스·독일·노르웨이·스웨덴 등의 고위 인사들이 대상이었다.

NSA와 경쟁 관계에 있는 CIA 또한 독자적 시긴트 수집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한국 관련 문건은 CIA가 작성했다고 알려졌다. 그 외에 정찰위성 개발과 운용을 전담하는 국방부 산하 국가정찰국(NRO)도 시긴트 위성을 관리하는 정보기관으로서 일정한 역할이 있다. 이런 미국 정보기관들이 첩보 대상의 대화나 통신을 어느 수준까지 도청할 수 있는지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이 사용하는 장비 종류나 제원도 극비 사항이다. 일례로 지난해 NRO가 최신 정찰위성 NRO-85를 비롯해 스파이 위성 7기를 새로 발사했지만,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