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적 규모의 피해를 낳은 FTX 파산 사태의 주역 샘 뱅크먼-프리드가 지난 13일 바하마에서 체포돼 법원 밖으로 끌려나오고 있다. 화이트칼라 범죄 수사로 유명한 뉴욕남부지검에서 수사를 받기 위해 곧 미국에 신병이 인도된다. /로이터 연합뉴스

가상화폐 업계를 강타한 미국 FTX 파산 사태가 법의 심판대에 오른다. FTX는 2019년 설립돼 가상화폐 붐을 타고 급부상, 기업 가치가 80억달러(약 10조3700억원)에 달한 세계 3위 가상화폐 거래소였으나, 자산을 부풀리고 고객 자산을 유용한 사실이 드러나자 지난달 파산 신청을 했다. 피해액이 수조원에 이르는 최악의 금융 사기로, 2008년 금융 위기를 초래한 리먼 브러더스 파산에 빗대 ‘코인판 리먼 사태’로 불리고 있다.

미 연방검찰인 뉴욕남부지검은 13일(현지 시각) FTX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30)를 사기·돈세탁 등 8개 혐의로 기소하고, 전날 바하마에서 체포된 이 젊은 억만장자에 대한 신병(身柄) 인수 절차에 착수했다. 그는 미국 정부의 범죄인 인도 요청을 받은 바하마 경찰에 체포된 후, 보석을 신청했으나 도주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미 검찰은 “이번 사건은 경영 실수나 허술한 관리 때문이 아닌 의도적인 사기”라며 “공소 혐의가 모두 인정되면 115년형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날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투자금 18억달러(약 2조3333억원)를 가로챈 혐의로 뱅크먼프리드에 대해 민사소송을,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는 연방상품법 위반 소송을 각각 제기했다. 연방 하원 금융위원회는 이날 FTX 사태 관련 첫 청문회를 개최했다.

미 연방검찰인 뉴욕남부지검에서 대미언 윌리엄스 지검장(오른쪽)이 13일(현지시각) 샘 뱅크먼-프리드 FTX 창업자를 8개 혐의로 기소한 공소장 내용을 공개하고 있다. 윌리엄스는 "고객에게서 훔친 더러운 돈이 부자들의 헌금으로 위장돼 양당의 영향력을 돈으로 사고 워싱턴 정책 방향에 영향을 주려는 뱅크먼-프리드의 욕망을 실현되는 데 이용됐다"며 "공소 내용이 모두 인정되면 최고 115년형, 즉 종신형이 내려질 것"이라고 밝혔다. /AFP 연합뉴스

이 사건에서 독특한 점은 뱅크먼프리드의 부모가 함께 수사 선상에 올라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범죄 용의자를 수사할 때 ‘자식 잘못 키운 죄’로 부모가 거론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 부모는 FTX 설립부터 투자 유치, 기업 이념 설정과 홍보, 대관 업무까지 전방위로 개입하고 수익도 공유해 ‘가족 범죄 사업’으로 봐야 한다는 게 언론과 검찰 안팎의 시각이다.

뱅크먼프리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캘리포니아주 소재 명문 스탠퍼드대 로스쿨 교수다. 진보 진영의 ‘파워 엘리트’ 커플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아버지 조셉 뱅크먼(67)은 미 세법 연구의 권위자로, 실리콘밸리 벤처 육성을 위한 세제 간편화, 기업 탈세 방지와 빈곤층 청년 지원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 어머니 바버라 프리드(71)는 법철학자로 자유시장경제를 비판하는 진보법 연구로 유명하다. 그녀는 영미 학계에서 유행하는 빈부격차 해소 운동 ‘효율적 이타주의’ 이론을 적용한 정치기부 단체(Mind the Gap)를 설립, 민주당과 학계를 잇는 역할을 해왔다.

父 조셉 뱅크먼, 母 바버라 프리드.

13일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부부가 명성과 영향력, 법조계와 정재계 요직에 진출한 제자 등 인맥을 총동원해 아들을 억만장자로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MIT를 나온 젊은 비즈니스 천재’로 알려진 샘 뱅크먼프리드는 부모의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 뱅크먼은 수시로 워싱턴DC에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가상화폐에 관심이 없는 의회와 정부의 유력 인사에게 소개했다. 제자인 거물 투자자 올랜도 브라보를 설득해 1억3000만달러의 첫 투자를 FTX에 끌어오자 투자 도미노가 이어졌다. 뱅크먼은 “FTX는 수익을 대부분 자선단체에 기부할 것”이라며 아들을 대신해 재단을 설립하고 홍보 행사도 전국에서 열었다. 진보 성향 투자자들은 열광했다. 이 아버지를 뉴욕타임스는 ‘FTX의 외교관’이라고 표현했다. 어머니 프리드는 FTX에서 1년여간 급여를 받았으며, 부부는 FTX 자금으로 구입한 바하마의 고급 별장에 드나들며 거주했다.

바하마서 보석신청 기각된 FTX 창업자 - 13일(현지 시각) 경찰관들이 바하마 수도 나소에서 체포된 가상화폐 거래소 FTX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가운데)를 호송하고 있다. 사기와 돈세탁 등 혐의로 기소된 뱅크먼프리드는 이날 바하마 당국에 보석을 신청했으나 도주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AFP 연합뉴스

어머니 프리드가 주창한 ‘효율적 이타주의’는 그대로 FTX의 경영 모토가 됐다. 그녀의 로드맵에 따라 민주당을 중심으로 정치권 기부를 하며 세 과시에 몰두했다. 20대인 샘 뱅크먼프리드는 2020년 대선 당시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개인 투자자로선 마이클 블룸버그에 이어 둘째로 많은 520만달러를 후원했다. 2022년 중간선거에서도 민주당에 400만달러를 냈다.

FTX 임원들은 공화당에 분산 후원을 했다. 뱅크먼프리드의 1차 목적은 가상화폐 규제 완화지만, 페이스북 창업 성공 뒤 민주당 대선후보로 거론됐던 마크 저커버그를 모델로 했다는 관측도 나왔다.

미 연방하원 금융위원회에서 13일 FTX 사태 관련 첫 청문회가 열린 가운데, FTX 파산 신청 후 CEO에 앉은 존 레이가 증인으로 출석해 자리에 앉고 있다. FTX 사태는 현재 미 재계는 물론 정치권에도 큰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AFP 연합뉴스

FTX가 내세운 사업 내용과 이념은 혁신적이었지만, 부(富)를 소비하는 방식은 구시대적이었다. 뱅크먼프리드는 처음부터 가상화폐 헤지펀드 계열사 ‘알라메다 리서치’를 세워 투자금 대부분을 빼돌려 미공개 벤처 투자에 몰두했다. 조세 회피처인 바하마에 본부를 두고 가족과 임직원용 호화 부동산을 사들이고, 정치 헌금을 뿌리며 정치적 방패 만들기에 주력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부모가 ‘핵심 스펙’으로 만들어준 자선 사업은 처음부터 거짓 음모였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은 13일 “뱅크먼프리드는 속임수에 기반한 ‘카드로 만든 집’을 지어놓고, 투자자들에게는 ‘가상화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건물’이라고 속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