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미국 텍사스주 프리포트에 있는 미 전략비축유 단지의 모습. 미국은 현재 6억배럴 이상의 전략비축유를 비축하고 있으며, 유가 급등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3500만배럴 이상의 비축유를 방출할 가능성이 크다. /로이터 연합뉴스

세계적으로 유가가 급등한 가운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르면 23일(현지 시각) 미 석유 공급 확대 차원에서 전략비축유(SPR) 방출을 명령했다. 한국과 중국, 인도, 일본, 영국도 미국의 비축유 방출 요청을 수용해 미국과 동시에 정유사에 방출하기로 했다고 백악관은 밝혔다. 이에 산유국 모임인 ‘석유수출국기구(OPEC)플러스’가 반발, 대형 석유 소비국과 산유국 간 갈등도 커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미국인이 사용하는 유가를 낮추고, 팬데믹 탈출 과정에서 불거진 석유 수급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부가 5000만배럴의 전략 비축유를 방출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비축유 방출 요청을 수용하기로 결정, 방출 물량 및 시기 등 구체적 사항은 우방국과 협의해 결정하기로 했다. 정부 관계자는 23일 “최근 급격하게 상승한 국제 유가에 대한 국제 공조 필요성, 한미 동맹의 중요성 및 주요 국가들의 참여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미국의 비축유 방출 제안에 동참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군사 동맹인 한국과 일본, 최근 안보 동맹체 ‘쿼드’ 일원으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는 인도 등 전략적 파트너들에 동시다발적으로 협조를 요청해왔다. 현재 145일분을 쌓아두고 있는 일본도 미국의 요청에 따라 방출에 동참한다. NHK는 “일본 국내 석유 수요가 매년 감소, 기시다 내각은 잉여분일 경우 법률상 방출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도도 비축유 500만배럴의 방출을 결정했다고 이코노믹타임스 등 현지 매체들이 전했다.

/자료=미 에너지부, 국제에너지기구

미국의 이번 전략 비축유 방출엔 한국 같은 동맹국뿐 아니라 중국도 동참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5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비축유 방출을 요청, 중국도 비축유 방출 작업을 검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중 갈등이 커지는 상황에서 양국이 석유가 안정을 위해 비축유 방출 건에 대해 이례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다.

전략 비축유는 경제 봉쇄·사고 등으로 석유 공급이 중단될 경우에 대비해 비축하는 원유로, 미국은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비축을 시작해 현재 6억배럴 이상을 비축하고 있다. 미국의 하루 평균 석유 소비량(2000만 배럴)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한 달 정도 쓸 수 있는 양이다. 전략 비축유는 텍사스주와 루이지애나주의 멕시코만 연안에 각각 2곳씩 모두 4곳에 저장돼 있다.

관련 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심각한 에너지 공급 차질로 국가 안보나 경제에 중대한 타격이 예상될 경우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전략 비축유를 방출할 수 있다. 대표적인 긴급 방출 사례는 1991년 걸프전 발발(조지 H W 부시 행정부),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조지 W 부시 행정부) 등이다. 가장 최근의 방출 사례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인 2011년으로 당시 아랍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 ‘아랍의 봄’ 영향으로 석유 수급이 차질을 빚었던 때다. 이때는 모두 국제에너지기구(IEA) 회원국들과 공동으로 비축유를 방출했다. 비상 상황이 아닌 경우에도 미 정부의 비축유 방출은 가능하지만 물량이나 시기는 제한된다. 미국이 단독으로 비축유를 방출한 경우도 20차례에 이른다.

유가는 지난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 둔화와 함께 폭락했다가, 올해 경제활동이 재개되면서 각국의 수요는 폭증했지만 생산·수송이 이를 따라잡지 못해 급등해왔다. 여기에 미국 등의 친환경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화석연료 분야 투자가 둔화되면서 생산 회복이 지연되기도 했다.

지난 17일 미 캘리포니아주의 한 주유소에 갤런당 5달러 안팎까지 치솟은 휘발유값 안내판이 붙어있다. 이는 지난해보다 2배 이상 급등한 가격이다. 미국은 유가 급등으로 인한 전반적 인플레이션으로 휘청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현재 유가 급등은 미국은 물론 각국에서 각종 생산·소비자 물가 상승을 이끄는 주범으로 꼽히고 있으며, 이 인플레이션으로 바이든 정부 지지율이 하락하는 등 정권의 최대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구상이 통할지는 미지수다. 석유수출국기구와 러시아 등 비OPEC 산유국 연합체인 OPEC플러스는 미국 등의 비축유 방출 계획에 반발하고 있다. OPEC플러스는 “주요 석유 소비국이 전략 비축유 수백만배럴을 방출하는 것은 현재 시장 상황을 볼 때 정당하지 못하다”며 “추가 생산하려던 계획을 재고할 수 있다”고 했다. 국제 유가는 OPEC플러스가 증산 계획을 바꿀 수 있다는 소식에 오히려 상승했다. 22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내년 1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전 거래일보다 0.81달러(1.07%) 오른 배럴당 76.75달러에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