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아침 TV 뉴스에선 요즘 앵커가 “오늘 뉴욕주는 갤런(3.78L)당 평균 3.55달러, 뉴저지는 3.45달러, 캘리포니아는 4.62달러…” 하는 식으로 지역별 유가(油價) 동향을 상세히 전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갤런당 3달러를 밑돌던 미국 휘발유값은 현재 전국 평균 3.40달러로 7년래 최고치를 돌파했다. 송유비가 추가되는 서부에선 5달러를 넘는 곳도 속출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선 기름 뽑는 펌프들 '스톱' - 3일(현지 시각) 미국에서 석유 생산량이 여섯째로 많은 캘리포니아 벨리지 유전의 시추펌프들이 멈춰서 있다. 최근 미국의 휘발유값이 갤런당 전국 평균 3.4달러를 넘으면서 7년 만에 최고치를 돌파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2050년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해 국내 석유 시추 제한, 화석연료 기업 보조금 지급 중단, 태양광·전기차 확대 등 친환경 정책을 한꺼번에 추진하면서 유가가 치솟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AFP 연합뉴스

제니퍼 그랜홈 미 에너지부 장관은 이날 유가 안정 실패를 인정하며 “미 가정의 난방비 부담도 지난해보다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유가 상승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유발, 미 경제를 둔화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최근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한 것을 두고 CNN은 “치솟은 유가와 물가, 범죄 증가 등 민생 불안에 대한 불만을 공화당이 파고들었다”고 분석했다.

유가 급등의 구조적 이유는 코로나 회복 단계에서 에너지 수요는 급등했지만, 팬데믹에 타격을 입은 생산·수송 시설과 인력은 복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 정·재계에서는 바이든 정부의 엇박자 에너지 정책을 원인으로 지적한다. 대표적인 것이 셰일오일·가스 문제다.

셰일오일·가스는 2000년대 들어 미국의 에너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줄 ‘총아’로 각광받았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2년 연두교서에서 “우리에겐 100년간 쓸 천연가스가 있다. 셰일가스를 미래 핵심 에너지산업으로 육성, 일자리 60만개를 만들겠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환경론자를 중심으로 채굴 때 사용되는 수압파쇄법(프래킹)이 환경오염을 일으킨다는 주장이 퍼지면서 민주당 등은 셰일오일·가스 산업을 강력 규제하기 시작했다.

미 셰일업계는 최근 백악관의 증산 요청에도 3개월 넘게 증산을 주저하고 있다. 셰일 석유 시추기업 ‘파이오니어 내추럴 리소시즈’ 최고경영자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바이든 정부가 임기 초부터 급진적 환경 규제를 도입해 화석 에너지 업계를 초토화시켜 놓고 이제 와서 증산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했다.

지난해 미 텍사스의 한 셰일 오일 시추업체가 가동을 멈춰 설비가 방치된 모습. 팬데믹으로 인해 원유 수요가 급감하면서 마이너스 유가를 돌파하자 각국 석유 생산 업체들은 일제히 생산을 줄였다. 여기에 최대 산유국 중 하나인 미국의 새 바이든 정부가 친환경 정책으로 화석연료 기업 규제를 강화한 여파로 석유 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첫날 미-캐나다 원유 수송 사업인 ‘키스톤 XL파이프라인 프로젝트’ 취소를 시작으로, 2050년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해 국내 석유 시추 제한, 화석연료 기업 보조금 지급 중단, 태양광·전기차 확대 등 친환경 정책을 한꺼번에 추진했다. 블랙록 등 월가의 투자사들은 정부 시책에 맞춰 일제히 화석연료 투자를 끊었다. 셰일 오일 업계는 운영 자금 대출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바이든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증산을 요청했지만, 중동 철군 등으로 대미 관계가 느슨해진 중동국들 역시 증산에 미온적이다.

유럽에서도 에너지 정책 실패가 벌어지면서 유럽인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 독일이 내년 1월 1일부터 가정용 LNG(액화천연가스) 가격을 16% 올리기로 했고, 네덜란드와 스페인, 프랑스 등도 가격 상승이 예고되고 있다. 올해 3월 1MMBtu(가스의 에너지 단위)당 6.127달러에 불과했던 천연가스 수입 가격이 지난 10월에는 31.05달러로 7개월여 만에 무려 5배가 되면서다.

원인은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위주의 성급한 저탄소 에너지 정책이다. 이 과정에서 전력 공급이 불안정한 재생에너지의 단점을 보완하고, 원전 폐쇄로 인한 전력 공급 부족도 해소하려 천연가스 발전을 크게 늘렸다. 석탄과 석유에 의존하던 난방 시스템은 대거 천연가스 난방으로 전환했다. 유럽의 천연가스 사용량은 2014년 4014억㎥에서 2019년 4696억㎥로 5년 만에 17% 급증했다. 그러자 유럽 천연가스 공급의 40%를 차지하는 러시아가 유럽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상황이 초래됐다.

지난달 19일 러시아 가즈프롬이 유럽에 공급하는 천연가스 공급량을 동결하겠다고 발표하자 천연가스 가격이 하루 만에 18% 올랐다. 러시아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는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등에 천연가스의 안정적 공급을 구실로 서방과의 관계를 끊게 하려 한다. 천연가스가 러시아의 외교 무기가 된 것이다. 유럽의 천연가스난은 유럽 국가의 인플레이션을 부추기면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당장 유럽산 자동차 부품과 기계류, 반도체 제조 장비 등의 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천연가스로 요소를 만드는 유럽에서도 요소수 가격이 오르며 해외 시장에서 요소수 추가 확보에 나섰다. 한국과 유럽이 요소수 물량을 놓고 다투게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