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의 국무장관 내정자인 앤서니 블링컨은 지난달 24일 폴란드 유대인 학살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도망친 자신의 의부(義父)가 미군 탱크 소리에 달려나가 흑인 미군 병사에게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라고 외친 일화를 들려줬다. 그는 “앞선 세대에게 미국은 ‘지구에서 유일한 희망’이었다”며 “겸손과 확신으로” 미국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하겠다고 했다. “미국이 돌아왔다”고 외친 바이든이나, 블링컨이 꿈꾸는 세계는 미국의 32·33대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1945년 4월~1953년 1월)이 만든 미국 주도의 전후(戰後) 질서다.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도 지난 8월 “바이든의 정책 문서들과 참모들 발언에선 “자유세계” “민주주의” “유럽” “주도한다(lead)”와 같은 트루먼 시절의 단어들이 계속 튀어나온다고 전했다. 미 언론 매체들은 “바이든이 물려받은 국내외 현실은 트루먼과 놀랄만큼 닮았다”며 “고립주의 분위기가 강하고 호의적이지 않은 의회 환경에서, 바이든은 트루먼의 정치력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뒤죽박죽 권력 이양

프랭클린 D 루스벨트(FDR) 대통령은 4선(選)에 도전하는 1944년 대선 유세 때, 자신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트루먼 부통령에게 어떠한 ‘계승’ 준비도 시키지 않았다.

1945년 4월12일 뇌출혈로 사망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 이어 미 대통령에 취임한 해리 트루먼이 5일 뒤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트루먼의 손자이자 트루먼 장학재단·도서관의 명예회장인 클리프턴 트루먼 대니얼은 지난달 22일 시애틀타임스 기고문에서 “FDR은 모든 일을 분산 위임해, 할아버지는 1945년 4월12일 대통령이 됐을 때 백악관이 해 오던 일들을 거의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원자폭탄 개발계획도 대통령이 되고서야, 처음으로 헨리 스팀슨 전쟁장관으로부터 들었다. 이런 경험 탓에, 트루먼은 자신의 후임자인 공화당 대통령 당선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백악관에 초청해 미팅에 참석시키고 브리핑을 받게 하는 등 지금의 미 정권이양 관행을 처음 만들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도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정책·현안 브리핑 등 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정권 인수위를 운영하고 있다.

◇워싱턴 엘리트들의 무시

조 바이든은 1988년 미 대선에 도전했다가 영국 노동당 대표의 연설을 대놓고 표절한 것이 드러나 경선을 포기해야 했다. 이후 코미디 프로의 단골 소재가 됐다. FDR이 자신의 부통령이었던 헨리 월러스를 갈아치우고 트루먼을 선택하자, 뉴욕타임스는 그를 “시골뜨기(rube)”라고 했다. 월러스는 소련에 유화적인 정책을 주장해, FDR과 민주당내 보수세력에겐 부담이 됐다. 미주리 주의 한 카운티에서 철도 관리·직원 임금을 책임지는 선출직 공무원에 불과했던 트루먼은 미주리 정가(政街)의 부패한 보스의 후원으로 컸기 때문에, 임기 내내 스캔들과 부패 의혹이 좇아 다녔다. 그가 실제 아주 부패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결백하지도 않았다. 바이든은 대선 내내 그의 아들 헌터와 집안이 바이든이 수십 년간 쌓은 워싱턴·글로벌 인맥을 가동해 이익을 취했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당내에선 좌파의 거센 도전 받아

194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연방 상·하원을 장악하자, 가뜩이나 2차대전 전비(戰費) 압력을 받던 트루먼으로선 더 이상 전임자인 루스벨트의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투자 재정정책인 뉴딜(New Deal)을 추진할 동력(動力)을 잃었다. 그러나 민주당 내에선 트루먼의 의지를 탓했고, 1948년 대선을 앞두곤 “영예롭게 사퇴하든지, 성난 시민들에게 쫓겨나든지 선택하라”는 당내 비판에 시달렸다. FDR의 부통령이었던 월러스는 1948년 대선에선 아예 FDR의 ‘진짜 후계자’를 자처하며 진보당(Progressive Party) 후보로 나섰다.

민주당 내 좌파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경선 중에 자신을 FDR에 비유하는 TV 광고를 내며 그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민주당 경선에서 좌파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자신을 FDR과 비교한 TV 광고를 내보냈다. 트루먼처럼, 바이든도 좌파로부터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과 기업인들과 너무 가깝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라이벌 공화당이 장악한 미 의회

최근 트루먼에 대한 책 ‘자유를 구하며(Saving Freedom)’을 쓴 MSNBC의 뉴스앵커 조 스카버러는 지난달 24일 워싱턴포스트에 “1947년 트루먼이 미 의회로부터 외교정책에 대해 초당적(超黨的) 지지를 받아내기는, 지금보다도 더 어려웠다”고 썼다. 당시 미 의회는 ‘미국 요새(Fortress America)’ ‘고립주의’ 전통으로 돌아가려는 공화당이 미 상·하원을 모두 장악했다. 바이든도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민주당 기반을 재정의하고, 공화당에 냉전(冷戰)을 설득

트루먼은 미국이 고립주의로 복귀하면서 1939년 히틀러의 등장을 방치했던 실수를 상기시키며 미 의회를 설득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부터 시작한 150년 전통의 고립주의를 깨고, 공산주의에 맞서는 국제질서를 개편했다. 전체주의 압력에 맞서는 국가들에 군사·경제 지원을 약속한 트루먼 독트린, 전후 유럽재건계획인 마샬 플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 등 미국 주도의 2차 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구축한 것이 트루먼이었다. 소련이 포위·고사(枯死)시키려는 서부 베를린에는 생필품을 공수(空輸)했다.

그가 FDR로부터 물려받은 민주당은 남부의 백인우월주의 분리주의자들로부터 소련에 동조하는 평화주의자들까지 ‘잡탕’이었다. 트루먼은 전통적인 남부 백인이 아닌 북부 도시의 증가하는 흑인들을 겨냥해 흑인들의 동등한 대우·권리를 지지했고, 미군의 흑백분리 정책을 폐지했다. 뉴욕매거진은 “이를 통해 트루먼은 반공(反共) 자유주의 정당의 모델을 세울 수 있었다”고 평했다.

트루먼은 지극히 평범한 성격의 인물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위대한 임무를 떠맡았다. 스카버러는 “미 역사가들은 한 세대가 지나서야, ‘트루먼이야말로 서구 문명을 구하는 데 누구보다도 공이 컸다’는 윈스턴 처칠의 평가에 동의하게 됐다”고 말했다. 바이든은 ‘위기의 시대’에 백악관에 입성하며, 이제 중국과의 대결은 트루먼 시대의 미·소 양극체제와 닮았다. 미 언론이 트루먼을 되짚어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