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직후의 조선인 학살과 관련, 당시 조선총독부가 일본 현지의 내무성 집계를 신뢰하지 않고 도쿄 출장소 직원을 통해 피살자 수를 독자 조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본지가 입수한 '사이토 마코토 문서'의 일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조선인 학살 피해자 추정치가 813명(빨간 원)이라고 적혀 있다. /성호철 특파원

당시 일본 내무성은 조선인 피살자를 231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조선총독부는 그해 12월에 자체 집계해 추정치 813명이라는 문서를 남긴 것이다. 문서에는 ‘가나가와현은 추가 조사 중’이라는 단서를 붙여, 조선총독부조차 보수적으로 잡아도 1000명 이상이라고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23일 본지는 일본 스기오 히데야 의원실(입헌민주당)을 통해 입수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문서(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을 지낸 1919~1927년, 1929~1931년 기록된 공식 문서)’를 미야모키 마사아키 닛쿄대학 역사자료센터 조교수와 함께 검토했다. 미야모키 조교수는 10여 년 전 와세다대학 재직 시, 일본 국회도서관과 함께 사이토 마코토 문서 정리를 담당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이 일어나고 3개월 뒤인 1923년 12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관동 지방 지진의 조선인 현황’ 자료는 ‘살해 조선인 수(數) 문서’에서 “조선총독부의 도쿄 출장원이 내사한 추정 수는 다음과 같다”고 썼다. 도쿄는 약 300명, 가나가와현은 약 180명, 사이타마현 166명, 지바현 89명, 군마현 약 40명, 도치기현 30명 등 총 813명이었다. 이 문서에서 함께 제시한 일본 내무성 집계는 학살 규모를 축소한 흔적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조선인 학살이 가장 심했던 가나가와현의 사망자 수는 단 1명으로 기록돼 있다.

사이토 마코토 문서에는 학살 은폐의 정황을 보여주는 내용도 있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각 경찰서에 보낸 5가지 지침이다. ‘매장한 시신은 빨리 화장할 것’ ‘유골은 일본인·조선인 구별이 안 되도록 조치할 것’ ‘살해된 사람인데 이름이 확인됐고 유족이 인도를 신청할 경우엔 유골을 넘길 것’ ‘유족이 아닌 자가 인도를 신청하면 유골을 넘기지 않을 것’ 등이다. 특히 다섯째 지침인 ‘기소된 사건인데 피해자가 조선인일 경우엔 빨리 유골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까지 처리할 것’은 은폐 지시로 해석될 수 있다.

미야모키 교수는 “은폐의 증거로 볼 수 있는 문서”라며 “당시 3·1운동 직후였기에 조선총독부는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이 전해져 한반도의 일본 지배를 흔들까 봐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선인 학살 문제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문서에는 조선총독부가 한반도 내 조선인 학살 소식이 전파되는 것을 막았다는 ‘유언비어 대책’도 포함돼 있다. ‘일본에서 조선인이 살해됐다’는 사실을 전했다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115명이 조선총독부에 잡혀 형사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