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전 일본 나가사키시 원폭자료관 앞 평화공원에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위령비 건립위원장을 맡은 강성춘 민단 나가사키현본부 단장과 강창일 주일대사, 이희섭 주후쿠오카총영사, 공명당 무카이야마 무네코 나가사키시의회 대표 등이 흰 천을 걷어내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라고 적힌 비의 모습이 드러났다/나가사키=최은경 특파원

일본 히로시마(広島)시에 이어 나가사키(長崎)시에도 ‘한국인 원폭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건립됐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등 재일교포 동포들이 건립을 추진한 지 약 30년 만이다.

6일 오전 나가사키시 원폭자료관 앞에 조성된 평화공원에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공개하는 제막(除幕)식이 열렸다. 굵은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도 위령비 건립위원장을 맡은 강성춘 민단 나가사키현본부 단장과 강창일 주일대사, 이희섭 주후쿠오카총영사, 공명당 무카이야마 무네코 나가사키시의회 대표 등 한·일 관계자 100여 명이 참석해 헌화하고 묵념했다. 나가사키 고등학생 평화대사(大使) 학생 8명은 평화를 상징하는 종이학을 접어 봉헌했다.

참석자들이 흰 천을 걷어내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라고 적힌 높이 3m 상당의 위령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면에는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희생된 동포들을 위한 추도문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졌다. 나가사키시엔 태평양전쟁 말기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이로 인해 약 7만4000명이 숨졌다. 당시 나가사키 지역에 살던 한국인은 약 3만5000명으로, 이중 수천~1만명이 원폭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나가사키시엔 그간 ‘한국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가 건립되지 못했다. 1979년 일본 시민단체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주축이 되어 한국인 희생자 추도비를 건립했지만, 히로시마와 달리 ‘한국인’이라는 문구는 포함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1994년 민단을 중심으로 나가사키 평화공원 내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를 별도로 건립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후 평화공원 재정비 공사 및 부지 확보 등의 이유로 크게 진전되지 못하다가 27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됐다.

위령비 앞에는 한국어·영어·일본어로 이 같은 사실을 설명하는 안내문이 세워졌다. 다만 나가사키시가 마지막까지 문제 삼았던 ‘강제징용’이라는 표현 대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본인의 의사(意思)에 반(反)하여 노동자, 군인 및 군무원으로 (나가사키에) 징용, 동원되는 사례가 증가하였다’는 문구를 사용했다.

제막식 이후 치러진 한국인 희생자 위령제에서 건립위원회를 이끌어 온 강성춘 민단 나가사키현본부 단장은 나가사키시·나가사키시의회·주후쿠오카총영사관·전국 민단 관계자 등의 도움으로 “우리 한국인 동포의 손으로 염원하던 위령비를 건립할 수 있게 됐다”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강창일 주일대사는 “나가사키 내에 각국 희생자, 일본 각 지방 희생자를 기리는 많은 위령비가 설립된 가운데 한국 희생자 위령비가 아직까지 없었던 점은 일본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며 “제막식이 있기까지 이런저런 어려움과 주변의 회의적인 시선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헤쳐오신 분들의 용기와 노고에 감사드린다”고 했다.

6일 일본 나가사키시 원폭자료관 앞 평화공원에 건립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나가사키 고등학생 평화 대사 학생이 종이학을 봉헌하고 있다/나가사키=최은경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