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일본 주간 '소년 챔피언'에 연재되는 데즈카 오사무(1928~1989)의 작품 '블랙잭' 포스터./'데즈카 2023' 프로젝트

만화 강대국 일본에서 50년 전 연재된 유명 고전 만화의 신작을 AI(인공지능)의 손길을 거쳐 올가을 선보인다고 NHK 등 현지 매체들이 12일 보도했다. 스토리와 그림 모두 챗GPT를 비롯해 AI가 도맡았다. 만화계에서 고인이 된 유명 작가 작품의 후속작을 제자나 동료 등이 각색해 내놓는 경우는 있었지만, AI를 활용한 사후 신작 시도는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보도에 따르면, 만화계 거장 데즈카 오사무(1928~1989)의 대표작이자 ‘의학 만화의 시초’로 불리는 작품 ‘블랙잭’이 생성형 AI인 챗GPT 등 도움으로 올가을 주간 ‘소년 챔피언’에 연재된다. 데즈카 오사무는 1950년대부터 ‘철완 아톰’과 ‘밀림의 왕자 레오’ ‘불새’ 등 히트작을 연달아 발표한 인물이다. 그가 1973년부터 10년간 242회 연재한 블랙잭은 난치병 치료에 천재적 재능을 보인 무면허 의사의 활약상을 다룬 작품이다. 일본 의료 시스템의 한계를 꼬집고, 존엄사·장기이식 등 의료 윤리를 둘러싼 이슈들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12일 일본 기자회견장에서 AI(인공지능) 챗GPT와 스테이블 디퓨전 등을 활용해 데즈카 오사무(1928~1989)의 작품을 제작해보고 있는 '데즈카 2023' 프로젝트 팀./NHK

‘데즈카 2023′이란 이름의 이번 AI 방식 신작 프로젝트는 데즈카의 장남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데즈카 마코토(62)씨가 주도했다. 시나리오 구상은 대화형 AI 챗GPT의 최신 버전인 GPT-4가 담당한다. GPT-4는 200화가 넘는 원작 에피소드를 분석해 작품 줄거리와 세계관, 주제, 등장인물 간 관계 등을 학습했다. 이를 토대로 인간이 특정 지시어를 입력하면 기존에 없던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한국에서 '우주소년 아톰'으로 방영돼 인기를 끈 일본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 /조선일보 DB

예컨대 ‘낙도(落島)’와 ‘코로나’란 키워드를 입력했더니, ‘어느 외딴섬에서 작중 주인공인 의사 블랙잭이 원주민들과 협력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아이들을 구한다’는 내용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림은 이미지 생성 AI ‘스테이블 디퓨전’이 맡았다. 스테이블 디퓨전은 데즈카의 생전 작품에 나오는 특유의 캐릭터 표정과 붓질 등 화풍을 학습했다.

데즈카 오사무/조선일보DB

1989년 사망한 데즈카 오사무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의 작풍(作風)은 AI를 통해 부활하게 된 셈이다. 프로젝트에 참가한 구리하라 사토시 게이오대 교수는 “이번 프로젝트로 AI와 인간이 어떤 관계를 구축할 것인가를 넘어 더 근본적 물음에 대한 답을 도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블랙잭’의 신작 프로젝트 소식이 전해지자, 데즈카 오사무의 열성팬들 사이에선 “고인 작품에 대한 모독이다” “(아들이) 아버지 유산을 끌고 와 돈을 벌려고 한다”는 등 반발이 나오기도 했다. 데즈카 마코토씨는 12일 기자회견에서 “단순히 신작을 발표하겠다는 것이 아닌 인간의 창조성과 재미 추구에서 AI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림과 스토리를 만드는 것은 AI지만, 이를 지시하고 감독하는 것은 인간 창작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AI로 인간을 대체하겠다는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지원을 위한 도구로 쓰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NHK는 “데즈카 오사무다운 만화에 (AI가) 얼마나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지가 핵심”이라며 “인간이 그만큼 AI에 정확한 지시를 내릴 수 있을지도 관건”이라고 했다.

2020년 AI를 통해 만들어낸 데즈카 오사무의 신작 '파이돈'/일본 인터넷 커뮤니티

AI로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데즈카 마코토가 주도한 ‘데즈카 2020′ 팀은 지난 2020년 AI에 데즈카 오사무의 여러 작품을 학습시켜 신작 ‘파이돈’을 출시했다. ‘그가 살아있다면 그렸을 법한’ 만화를 창작해 낸 것이었다. 다만 AI 역할이 캐릭터 설정과 스토리 구상에 그쳤고, 세부적인 작업 대부분은 인간 창작자의 손을 거쳐야 했다는 이유로 한계가 지적됐다.

일본과 함께 만화 강국으로 꼽히는 미국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다. 미 앨런인공지능연구소는 1960년대 방영된 애니메이션 ‘프린스톤 가족’의 3초짜리 클립 영상 2만5000여 개를 2018년 AI에 학습시켰다. 하지만 AI가 내놓은 작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림이 깨져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포의 외인구단(1983~1984년 연재)’으로 유명한 만화가 이현세(67) 화백이 작년 말 만화 기획사 재담미디어와 함께 공포의 외인구단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작품을 AI에 학습시키는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이 화백 사후에도 그의 화풍으로 그려진 만화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포의 외인구단 출간 40주년 기념 프로젝트였다. 재담미디어는 올해 안으로 AI가 그린 신작을 출간할 계획이다.

이현세 화백의 '공포의 외인구단'/조선일보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