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5월 10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역사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Queen Cleopatra)’ 공식 예고편에서 흑인 배우 아델 제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하고 있다./넷플릭스 유튜브

문화계의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 논란이 역사 왜곡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전설적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69년~30년)를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퀸 클레오파트라’가 클레오파트라 역할로 흑인 배우 아델 제임스를 캐스팅하자 과도한 PC주의가 역사까지 뒤튼다는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 혈통으로 백인이었다는 것이 이집트와 그리스 등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다큐멘터리는 다음 달 10일 선보인다.

미국 문화계에선 백인 주인공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 일었고, 이에 흑인 배우의 등장을 꾸준히 늘려 왔다. 그리스 신화 속 캐릭터나 백인이 주인공인 만화의 실사판 주인공을 흑인이 맡는 식이다. 하지만 역사 속 실존 인물인 클레오파트라는 차원이 다르다는 의견이 많다. 기록이 존재하는 인물을 다큐멘터리 시리즈에서 인종을 바꾸어 표현하는 것은 마치 선덕여왕을 흑인으로 표현하는 듯한, 엄연한 역사 왜곡이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퀸 클레오파트라’ 제작사인 웨스트브룩스튜디오는 흑인 배우 부부인 윌 스미스와 제이다 핑킷 스미스가 설립했다. 작가 페레스 오위노, 은넨네 이우지 역시 모두 흑인이다.

오는 5월 10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역사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Queen Cleopatra)’ 공식 예고편에서 흑인 배우 아델 제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하고 있다(왼쪽 사진). 역사학자들은 실제로는 백인이었다는 증거가 많은 클레오파트라를 흑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들은 유명 배우 비비언 리(위·1945년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엘리자베스 테일러(가운데·1963년 ‘클레오파트라’), 모니카 벨루치(2002년 ‘미션 클레오파트라’)가 과거 작품들에서 클레오파트라 역을 맡았던 모습. /넷플릭스 유튜브·게티이미지코리아

이집트와 그리스의 역사학계는 ‘흑인 클레오파트라’에 거세게 반박하고 있다. 2011년 이집트 고대유물부 장관을 지냈던 고고학자 자히 하와스는 14일(현지 시각) 이집트 인디펜던트 인터뷰에서 다큐멘터리 ‘퀸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완전히 가짜”라고 비난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였고, 이는 그가 흑인이 아닌 데다 금발이었다는 걸 의미한다. 넷플릭스는 이집트 문명의 기원이 흑인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퍼뜨려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자신을 이집트인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국제 청원 사이트 ‘체인지’에 “역사를 왜곡하는 넷플릭스의 ‘퀸 클레오파트라’ 개봉을 취소하라”는 게시글을 올려 8만5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그렇다면 제작사가 클레오파트라를 흑인으로 설정한 근거는 무엇일까. 다큐멘터리 책임 프로듀서인 제이다 핑킷 스미스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간 흑인 여왕에 대한 이야길 듣지 못했지만, 세상엔 많은 흑인 여왕이 존재했다”고 했다. 13일 공개된 공식 예고편에 등장한 해설자는 “우리 할머니는 학교에서 뭐라고 가르치든 간에 늘 ‘클레오파트라는 흑인’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딱히 증거가 있어서 흑인을 쓴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학자들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속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생활 방식을 감안하더라도 흑인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해당 왕조는 순수 혈통 유지를 위해 근친혼으로 대를 이었다고 알려졌다. 즉 가문에 흑인의 유전자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는 뜻이다.

일각에선 한때 아프리카 흑인들이 이집트를 지배해 파라오를 차지한 적이 있다는 점을 들어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집트 전문가인 유성환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집트를 정복한 기원전 332년 이전의 이야기로 클레오파트라와는 수백년 이상 차이 나는 무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필레신전이나 덴데라신전 등 이집트 유적지에 남아 있는 부조(浮彫)와 조각상, 주화 같은 역사적 사료에 등장하는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을 보면 그가 흑인이란 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다”며 “오히려 움푹 들어간 눈매나 오뚝 솟은 콧대, 얇은 입술 등 전형적인 유럽 출신 백인이라는 근거가 많다”고 말했다.

1945년 제작된 영화 ‘시저와 클레오파트라’에서 클레오파트라 역은 영국 배우 비비언 리가, 1963년 개봉작 ‘클레오파트라’에선 영국 출신 미국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맡았다. 2002년 ‘미션 클레오파트라’에선 이탈리아 배우 모니카 벨루치가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