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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1900년을 전후해 초창기 유럽에 진출한 조선과 대한제국의 ‘글로벌 노마드’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입니다. 오늘은 파리를 처음으로 방문한 한국인과 최초의 한국인 파리 유학생이 누구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라 잃은 설움을 겪던 시절인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일본 지배의 부당함을 외쳤던 우사(尤史) 김규식(1881~1950)의 흔적을 파리에서 찾아가 취재했던 경험담을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파리에 처음 가본 한국인은 고종의 외사촌
한국인으로서 파리에 처음 가본 건 누구였는지 아시는지요. 그리고 그때가 언제쯤이었을까요. 유럽한인총연합회가 펴낸 ‘유럽 한인 100년의 발자취’를 비롯해 여러 역사서를 보면 한국인으로서 프랑스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디딘 이는 민영익(1860~1914)입니다. 그는 명성황후 집안의 세도가로서 고종의 외사촌입니다.
19세기에 어떻게 해서 한국인(당시는 조선인)이 머나먼 파리까지 가 볼 수 있었을까요. 미국과의 외교 관계가 계기가 됐습니다. 미국 정부는 1883년 루시어스 푸트라는 외교관을 조선에 공사로 파견했습니다. 최초의 주(駐)조선 미국 공사죠. 1882년 조선과 미국 간에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5월 푸트가 파견됐습니다.
고종은 푸트가 지금의 서울에 온 지 두 달이 지나 민영익을 답례 사절 대표로 미국에 보냈습니다. 푸트 공사의 권유가 있었습니다. 민영익은 특명전권대신으로 임명됐으니까 특사라고 볼 수 있겠구요. 홍영식이 부대신으로 임명됐고, 수행원 중에는 유길준이 있었습니다.
◇'민씨 왕자’ 미국 군함 타고 대서양 가로질러 유럽으로
민영익 일행은 일본을 거쳐 배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입국해 미국 본토를 열차로 가로질러 뉴욕에서 체스터 아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했습니다. 워싱턴DC에 도착해보니까 아서 대통령이 뉴욕에 가 있다는 걸 알게 돼 다시 뉴욕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미국 언론에서는 고종의 외사촌인 민영익을 ‘민씨 왕자(Prince Min)’로 칭했다고 합니다. 당시 아서 대통령과 민영익 일행의 만남을 그린 신문 일러스트레이션이 남아 있는데요. 민영익으로 추정되는 이를 비롯해 모두 3명이 아서 대통령에게 엎드려 절을 하는 장면입니다.
민영익 일행은 셋으로 갈라졌습니다. 유길준은 현지에서 민영익의 허가를 얻어 조선인 최초로 미국 유학생이 되기로 하고 남았습니다. 부대신 홍영식을 비롯한 몇 명은 바로 조선으로 돌아갔구요. 민영익과 2명은 아서 대통령이 내준 군함을 타고 유럽을 방문했습니다. 민영익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둘러봤구요.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를 거쳐 싱가포르, 일본을 거쳐 돌아왔습니다.
◇첫 한국인 파리 유학생은 김옥균 살해한 홍종우
그럼 최초의 조선인 프랑스 유학생은 누구일까요. 김옥균을 살해한 조선 후기 개화파 문신 홍종우(1850~1913)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정치사상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알게 돼 프랑스 유학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1888년 먼저 도쿄에 간 홍종우는 아사히신문사 식자공으로 일하며 여비를 모아 프랑스로 넘어갈 기회를 엿봤다고 합니다.
1890년 홍종우는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크리스마스 직전 파리에 당도했습니다. 중동·동양 문화재·미술품을 전시한 기메박물관에서 보조연구원으로 취직해 일을 했습니다. 기메박물관은 에밀 기메(Guimet)라는 사업가에 의해 당시 막 설립된 박물관인데요. 유럽에서는 동양 문화와 관련한 소장품을 가장 방대하게 갖추고 있는 곳입니다. 에펠탑 건너편 파리 16구에 있습니다.
당시는 현지에서도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을 때라 홍종우는 다양한 프랑스 식자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종종 사교단체 초청을 받아 동북아 정세나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계속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때 파리에서는 홍종우가 워낙 눈에 띄어서 일간지 르피가로에서 그를 다루기도 했습니다.
당시 벨기에 출신 프랑스 작가 조세프 앙리 로즈니(1856~1940)라는 작가가 홍종우의 도움으로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번안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프랑스에 소개된 최초의 한국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로즈니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의 초대 심사위원을 맡았을 정도로 현지에서는 저명한 작가였습니다.
홍종우는 또한 1888~1889년 조선을 여행하고 돌아온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 바라가 수집한 자료를 분류하는 일도 도왔다고 합니다. 파리에서 딱 3년을 지낸 홍종우는 1893년 조선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살해합니다. 김옥균을 죽인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미국의 이승만 참석이 좌절되자 상하이의 김규식이 참석
파리에서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외교 활동을 가동한 무대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였습니다. 1차대전이 끝나고 승전국끼리 모여 일종의 국가간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였는데요.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일본 지배의 부당함을 열강들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습니다.
원래 미국에 있던 대한국민회는 이승만 외 2명을 파리에 보낼 대표로 선출했지만 미국이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아 프랑스에 갈 수 없었습니다. 파리에서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이장규씨(파리7대학 박사과정)는 “당시 일본의 부탁을 받은 미국이 미국에서 이승만이 프랑스로 출국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했습니다.
대신 상하이의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 외 3명이 중국 정부로부터 중국인 이름으로 된 여권을 발급받아 파리로 향했습니다. 김규식은 3·1만세운동이 벌어지기 한달 전인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해 3월 13일 파리에 당도했습니다.
3월 20일부터 김규식 일행은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의 한 아파트에 세 들어 살던 중국인의 집에서 한달 가량 머물렀습니다. 그러는 사이 4월에 상하이임시정부가 수립됐고, 임시정부는 파리에 있는 김규식을 외무총장 겸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 대표로 임명했습니다. 김규식에게는 신임장을 보냈습니다.
◇직지심경 발견한 박병선 박사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사무실 자리 알아내
드디어 1919년 4월 14일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사무실을 얻어 김규식이 정식으로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파리강화회의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발족 100주년을 맞은 2019년 제가 이곳에 직접 가본 적이 있습니다.
파리 시내 9구의 고풍스러운 트리니테성당에서 동쪽으로 한 블록을 걸어가면 사거리 모퉁이에 7층짜리 석조 건물이 나옵니다. 파리에서 흔한 19세기 오스만 양식의 건물이죠. 주소는 샤토덩가(街) 38번지입니다. 1층에는 수퍼마켓 체인점 프랑프리가 있고 2층부터는 아파트입니다. 이장규씨는 “밖에서 김규식이 타자기 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김규식이 1층 또는 2층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습니다.
낡은 파란색 아파트 출입문 왼쪽 위에 자그마한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윗쪽에 프랑스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절단이 있던 곳’이라고 씌여 있고 아래는 한국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청사’라고 돼 있습니다. 이 건물이 파리의 ‘독립운동 전진기지’였던 셈입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한 50대 주민에게 현판의 의미를 아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5년 넘게 사는 동안 무심코 몇번 쳐다보긴 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다른 주민들도 그럴 것”이라고 했습니다. 역시나 큰 관심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건물에서 김규식이 혼신의 힘을 다해 독립 청원을 부르짖었다는 사실은 재불 역사학자 박병선(1923~2011) 박사 등이 고(古)문서들을 뒤져 찾아냈습니다. 2011년 별세한 박병선 박사는 파리에서 직지심경의 존재를 처음 발견해 세상에 알린 인물입니다. 그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약탈해간 의궤를 프랑스에서 찾아내 돌려받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있던 건물에 독립운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곳이었다는 기념물을 세우려 많은 한국인들이 애썼습니다. 하지만 건물주의 반대로 한동안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인 사회와 주불 한국대사관이 나서 파리시를 움직인 끝에 건물주가 겨우 마음을 돌렸고, 2006년 3·1절을 맞아 현판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김규식은 미국에서 7년간 유학하며 프린스턴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은 신지식인이었습니다. 당시 파리위원부에서는 스위스에서 온 이관용, 상하이에서 온 조소앙, 미국에서 넘어온 황기환 등이 김규식을 돕긴 했지만 사실상 김규식 1인 체제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특급 호텔에 묵은 68명의 일본 대표단과 맞선 김규식
파리에서 김규식의 대일(對日) 항전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습니다. 홀로 고군분투한 김규식과 달리 1차대전 승전국이었던 일본은 ‘세계 5강’을 자처하며 기세등등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68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파리에 파견했습니다. 그때 일본 대표단은 파리에 와서 어디에서 묵었을까요.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있는 건물에서 센강이 있는 남쪽 방향으로 15분을 내려가면 방돔(Vendôme) 광장이 나옵니다. 한복판에 세워진 나폴레옹의 오스털리츠 전투 승전 기념탑을 고풍스러운 옛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죠.
그중 서남쪽에 있는 방돔광장 3번지가 당시 일본 사절단이 머물렀던 ‘브리스톨 호텔(Hôtel Bristol)’ 자리입니다. 1718년 지어진 이 건물은 19세기부터 파리의 대표적인 호화 호텔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허름한 건물에서 몸부림친 김규식과 파리 중심부에 우뚝 선 일류 호텔에 머무른 일본 사절단은 극명하게 대조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사절단의 젊은 외교관 사와다 렌조(沢田廉三·1888~1970)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우리는 브리스톨 호텔을 통째로 빌렸다. 호텔 앞에는 30대에 가까운 자동차에 일본을 상징하는 휘장이 자랑스럽게 휘날렸다. 분명 그것은 파리지앵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광경이었다.” 사와다 렌조는 후일 외무성 차관과 주불·유엔대사를 지냈습니다.
공교롭게도 사와다 렌조는 1960년대에는 4차 한·일 회담의 일본측 대표였습니다. 브리스톨 호텔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더 이상 호텔은 아닙니다. 브루나이 국왕이 사들여 개조한 다음, 파리를 가끔 방문할 때 묵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리 8구에 있는 ‘르 브리스톨 파리(Le Bristol Paris)’라는 고급 호텔은 1919년 일본 사절단이 묶었던 브리스톨 호텔과는 다릅니다.
◇일본의 방해로 결국 열강의 관심 이끌어내는 데 실패
김규식은 파리에서 소식지 ‘자유 대한(La Corée libre)’을 내면서 독립 국가의 대표라는 점을 알리려 애를 썼습니다. 파리강화회의에 온 각국 대표에게 독립을 원한다는 청원서도 보냈습니다.
그때 김규식이 로베르 브뤼셀 프랑스 교육부 국장에게 프랑스어로 쓴 편지에는 “우리의 독립 요구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어려운 항쟁이지만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크로아티아가 주권을 회복한 것처럼 한국도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돼 있습니다. 그의 열성적인 활동을 다룬 기사는 유럽 181개 신문에 걸쳐 517건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김규식은 필사적인 활동을 펼쳤지만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파리강화회의는 정식 국가의 대표가 아니라는 이유로 김규식의 입장을 거부했습니다. 일본의 부탁을 받은 프랑스 경찰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습니다.
김규식은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의 프랑스어 통역이었던 스티븐 본잘(Bonsal)이라는 미국 외교관을 접촉했습니다. 본잘은 김규식에게 호의적이었죠. 하지만 그는 “코리아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다룰 정도로 세계적인 이슈는 아니다”는 냉정한 이야기를 전했다고 합니다.
1919년 7월 14일 열리는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행사를 앞두고 김규식은 프랑스 외교부에 한국 대표로 참석할 수 있도록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응답은 행사가 끝난 다음에야 왔다고 합니다. 이장규씨는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김규식이 최선을 다한 활약상이 당시 프랑스 언론 기사에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열강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한 김규식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시력도 나빠졌습니다. 강대국들의 무반응에 실망한 그는 그해 8월 파리를 빠져나와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며 활동 무대를 바꿨습니다.
이상으로 최초의 한국인 파리 방문객, 최초의 한국인 파리 유학생의 흔적을 살펴봤습니다. 103년전 파리강화회의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떨쳐내기 위해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하듯 일본에 맞선 김규식의 발자취도 되짚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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