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트러스 총리가 취임 44일 만에 사임을 전격 발표하면서 13년째 영국을 이끌고 있는 보수당이 침몰 위기에 직면했다. 2016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이후 6년 만에 네 번째 총리 낙마다. 보수당에 대한 영국 국민의 실망감이 극대화하면서 지지율은 노동당의 절반 수준으로 폭락했다. 영국 국민 5명 중 3명이 조기 총선을 원하며, 당장 총선이 실시되면 노동당이 대승을 거둘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 보수당 총리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21일(현지 시각) 최근 각종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보수당이 1997년 총선 참패 이후 25년 만에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고 분석했다. 노동당 지지율은 51~54%까지 치솟은 반면, 보수당 지지율은 21~23%까지 떨어졌다. 지금 총선이 실시되면 하원 650석 중 노동당이 411석을 얻고, 현재 357석인 보수당은 137석으로 쪼그라들 것으로 예측됐다. 1997년 당시 존 메이저 총리의 보수당은 기존 의석(336석)의 절반 이하인 165석 확보에 그치면서 418석을 석권한 노동당에 정권을 뺏겼다. 이후 노동당은 2010년까지 13년을 집권했다.

영국 매체들은 보수당 위기 원인을 “자중지란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브렉시트 이후 정치적 고비 때마다 리더를 비난하고 끌어내리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당권을 좌지우지하는 보수당 평의원 모임 1922 위원회가 있었다. 소장파 의원들의 총리 교체 요구가 나올 때마다 당내 분위기를 추스르는 ‘전략적 대응’보다 총리 사퇴를 압박하는 ‘기계적 대응’을 하면서 “총리를 흔드는 도구가 됐다”는 것이다. 테리사 메이,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 모두 당내 강경파가 주도한 1922 위원회의 사퇴 압박을 받고 물러났다. 이들을 물러나게 만든 강경파 리더 보리스 존슨 전 총리도 이 위원회 압력에 굴복해 자리에서 내려왔다.

이 과정에서 최측근으로 여겨졌던 핵심 장관이 사표를 던지며 총리에게 등을 돌리는 내부 분열상도 나타났다. 존슨 총리 때는 리시 수낙 당시 재무장관이, 이번에는 수엘라 브레이버먼 내무장관이 그 역할을 했다. 당내에 분열과 배신이 판을 친 셈이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보수당의 이런 지리멸렬한 모습에 실망한 기존 지지층의 이탈이 보수당 지지율 폭락의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보수당 총리들은 과욕과 설익은 정책, 스캔들, 인사 실패로 발목이 잡혔다. 존슨 전 총리는 계속되는 거짓말 논란을 일으키며 보수당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그 대안으로 선택된 트러스 총리는 옥스퍼드대 출신에 백인 여성이라는 배경,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를 추종하는 강단 있는 이미지로 망가진 신뢰를 되살려줄 것이란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대규모 감세 같은 중요한 정책을 부적절한 인물에게 맡겼다가 결국 자신의 정치 인생마저 무너지는 상황을 맞게 됐다. 감세 정책 실패 책임을 지고 경질된 쿼지 콰텡 전 재무장관은 경제학 박사지만, 세부 전공은 경제사다. 영국 금융가에선 “세계 금융 중심지인 영국의 재무장관으로는 부적합하다”는 평이 있었다. 콰텡 장관은 “쓰는 만큼 줄여야 한다”는 균형 재정 원칙을 무시하고, 오직 감세만 내세운 ‘미니 예산’을 성급하게 발표했다가 ‘금융 대란’을 불렀다.

현재 보수당에선 사태 수습에 나설 차기 총리도 마땅치 않다. 1922 위원회는 다음 주 중 의원 100명 이상의 지지를 받은 후보를 대상으로 전체 당원 투표가 아닌, 의원들 투표만으로 새 총리를 선출할 예정이다. BBC는 “리시 수낙 전 재무장관과 페니 모돈트 원내대표, 존슨 전 총리가 유력한 차기 후보”라고 전했다. 그러나 수낙 전 장관은 이미 당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전력이 있다. 모돈트 대표는 무난하지만 눈에 띄는 매력이 없다는 평이 나온다. 이미 도덕적 타격을 받은 존슨 전 총리에 대한 노골적 반대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영국의 현 상황을 ‘브리탤리(Britaly)’라고 칭하면서 “정치적 불안정과 저성장, 금융시장 악화 등 영국이 이탈리아와 비슷한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