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영국 런던 주영대한민국대사관에서 박은하 당시 대사가 본지와 인터뷰 하고 있는 모습./이해인 기자

2018년 8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주영국 한국 대사를 지낸 박은하 전 대사는 8일(현지 시각)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숨진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의 만남을 회고하며 “한국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계셨다”고 말했다.

박은하 전 대사는 9일 오전 본지 통화에서 “2018년 대사 신임장을 제정하기 위해 찾은 런던 버킹엄궁전에서 여왕을 처음 만났다”고 말했다. 당시 버킹엄궁전에 들어섰을 때, 사람을 압도하는 왕실 분위기를 느끼고 놀랐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몸집이 나보다 작으시지만, 넓은 방을 꽉 채우는 카리스마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며 “‘작지만 큰 힘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박은하 전 대사는 말했다.

박은하(오른쪽) 전 주영국 한국 대사가 지난 2018년 영국 런던 버킹엄궁전에서 한복 차림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있다./조선일보DB

하지만 압도적인 분위기와 달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인식은 “굉장히 따뜻하신 분”이라는 이미지로 금방 바뀌었다고 한다. 박은하 전 대사는 “공식적인 이야기만 나눌 줄 알았는데, 여왕께선 나를 보시더니 20년 전 한국 안동의 한 마을을 방문했을 때 현지 주민들로부터 받았던 환대와 그에 대한 감사함을 일일이 표현하셨다”며 “한 도예 가게에서 선물로 받은 차(茶) 주전자를 ‘아직 매일 쓰고 있다’고도 하셨다”고 말했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한 당시 안동 하회마을에서 '생일상'을 받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박은하 전 대사에게 “서울의 한 호텔을 찾았을 때 야경이 너무 아름다웠다”며 “그때 찍은 사진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은하 전 대사는 “나뿐만 아닌 각국에서 온 대사를 모두 만나실 텐데, 한국에 유달리 특별한 기억을 갖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박은하 전 대사는 또 “코로나 전까지 버킹엄궁전에선 매년 주요 인사들을 초대하는 가든파티가 열렸다”며 “그때 다시 만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안동 농민들로부터 선물 받은 사과가 ‘아주 맛있었다’며 재차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말했다.

박은하 전 대사는 “영국뿐 아닌 전 세계에 따뜻한 메시지를 통한 용기를 주시고, 여성 리더로서의 영감을 전파하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떠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나 역시 여성 대사 출신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여성 지도자가 세상을 떠난 것에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고도 했다.

천영우 전 주영국 한국 대사가 지난 2008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신임장을 제정하고 있다./천영우 전 대사 페이스북

천영우 전 대사는 2008~2009년 약 1년 반가량 영국 대사로 재임했다. 그는 “신임장을 제정했을 때 외에 영국 왕실에서 진행하는 각국 외교단이 참석하는 공식 행사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세 번 정도 만났다”며 “‘내가 다녀간 안동 하회마을이 한국의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는데 맞느냐’던 여왕의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고 본지 통화에서 말했다.

그는 “우리는 국가의 왕이라고 하면 조금은 어려운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내가 만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아주 따뜻한, 마치 이웃집 할머니와 이야기하는 듯 편안한 대화를 주도하시는 분이었다”며 “만날 때마다 북한 문제 등 한국 이슈에 대한 우려를 전하곤 하셨다”고 말했다. 천영우 전 대사는 “여왕의 자상하셨던 모습이 그립다”며 “그의 서거를 애도하고 명복과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