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은 경제 협력을 통한 대(對)러 관계 개선이 ‘평화’로 이어진다는 단꿈에 빠졌다. 강경파 환경론자들의 압력에 원전의 위험성은 과대평가하고, 러시아산 에너지 종속의 위험성은 무시했다. 독일은 그렇게 푸틴의 덫에 빠졌다.”

26일(현지 시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천연가스 악마’로 묘사한 독일 주간 슈피겔 표지./슈피겔

독일 주간 슈피겔이 26일(현지 시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천연가스 악마’로 묘사한 커버스토리(표지 기사)를 통해 독일이 러시아 천연가스에 중독(中毒)된 이유를 분석했다. 독일은 지난해 말 기준 천연가스의 55%, 전체 에너지의 13.5%를 러시아산에 의존하고 있다. 지난 50여 년간 정치권과 정부, 기업의 순진하고 잘못된 선택이 누적되면서 ‘치명적 상황’이 초래됐다는 것이 슈피겔의 분석이다. 경제협력을 통해 공산 독재국가와 신뢰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믿음, 치밀한 준비 없이 맹목적으로 추진한 탈원전·친환경 에너지 정책 등이 여러모로 문재인 전 정부를 연상시킨다는 말도 나온다.

이 매체는 사태의 기원을 사민당(SPD)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69년부터 펼친 ‘동방 정책(Ostpolitik)’에서 찾았다. 러시아와 관계 개선을 위한 경협 사업의 일환으로 시베리아 천연가스 개발이 시작됐다. 독일이 기술과 자본을 제공하면, 러시아가 가스로 갚는 방식이었다. 이는 독일의 철강·화학 대기업들과 대형 금융기관들에도 달콤한 비즈니스 기회로 다가왔다. 1970년대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 독일 좌파 정치권은 “중동보다 러시아가 훨씬 믿을 만하다”는 인식까지 갖게 됐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이 본격화했다.

슈피겔은 “1991년 독일의 러시아 가스 의존도는 이미 33%에 달했다”며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정권이 위험보다 기회만 봤다”고 했다. 2000년대 들어 러시아와 독일을 직결, 더 많은 천연가스를 더 싸게 실어오는 ‘노르트스트림’ 사업도 시작됐다. 이 매체는 “노르트스트림은 처음부터 푸틴의 아이디어로 시작, 그의 측근이 장악해 온 사업”이라며 푸틴 대통령이 노르트스트림을 처음부터 독일을 겨냥한 ‘지정학적 무기’로 기획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동구권에서는 “러시아가 천연가스와 석유로 유럽을 분열시키려 할 것”이란 경고가 나왔다. 미국도 “천연가스 수입원을 다양화하라”고 조언했으나 독일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슈피겔은 “그 배경엔 러시아 가스는 어떤 정치적 여파에도 상관없이 계속 공급될 것이며, 독일은 절대 러시아 가스에 의존적이지 않다는 잘못된 믿음이 있었다”며 “푸틴이 이를 악용할 것이란 자명한 사실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 매체는 정부 정책과 산업계의 문제도 지적했다. 값싼 천연가스가 흘러 넘치자 정부는 섣부른 에너지 시장 자유화에 나서 ‘안정적 에너지 공급’이라는 정부의 정책적 역할을 방기(放棄)했다.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자, 탈원전 여론에 휩쓸려 성급한 원전 폐쇄를 단행했다. 또 급진적 친환경 에너지 전환 목표를 채택해 놓고 이를 실현할 ‘마스터플랜’ 없이 무턱대고 천연가스에 의존했다. 기업과 투자자들은 값싼 러시아산 천연가스로 얻는 고수익에 정신이 팔려 독일 산업과 에너지 인프라가 자생력(自生力)을 잃어가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풍력 발전 허가를 받는 데 5~6년이 걸리고, 고전압 송전망이 부족해 북부의 잉여 전력을 남부 공업 지대로 보내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는 최근 독일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량을 기존의 40% 수준으로 줄였다. “설비 문제”라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대러 경제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에 참여한 것에 대한 보복이란 것이 중론이다. 장기화하면 발전, 난방은 물론 화학 기업의 원료 공급도 큰 타격을 받는다. 슈피겔은 “러시아는 믿을 만한 파트너이고, 정치와 경제는 별개라는 주장은 ‘세기의 거짓말(Lebenslüge)’이었다”며 “독일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청구서가 지금 날아들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