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한 러시아군은 젤렌스키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을 제거하기 위해 수도 키이우의 대통령궁을 급습했지만 미수에 그쳤고, 대피를 거부하고 수도 방어 의지를 밝힌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 항전의 구심점이 됐다. 당시의 긴박한 정황이 미 시사 주간지 타임이 지난 29일 공개한 심층 인터뷰에서 드러났다. 타임 측은 이번 인터뷰를 위해 2주간 젤렌스키와 동행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침공이 시작된 지난 2월 24일 새벽 폭발 소리에 잠이 깼다”며 “딸(17)과 아들(9)을 깨워 대피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러시아군 특수부대가 낙하산으로 키이우로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얼마 후 대통령궁 주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사무실 안에서도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릴 정도로 러시아군이 가까이 접근했다. 러시아군의 목적이 젤렌스키의 신속한 제거임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5월9일-5월16일 합본보로 나온 시사 잡지 타임의 커버로 실린 젤렌스키 대통령/타임 트위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 정부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폴란드 동부로 대피해 망명 정부를 세우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나는 탈출 수단이 아니라 탄약이 필요하다”는 유명한 말로 응수했다. 우크라이나군도 “방어에 취약한 대통령궁 대신 키이우 밖의 벙커로 가자”고 보고했으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마저 거부했다고 타임지는 전했다. 그의 항쟁 의지는 우크라이나의 예상 밖 장기 항전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흔들린 순간도 있었다. 이튿날인 25일 러시아 특수부대의 공격이 한풀 꺾이자 그는 대통령궁 마당으로 나가 스마트폰으로 정부 핵심 인사들과 ‘셀프 비디오’를 찍었다. 그의 흔들림 없는 리더십의 상징이 된 유명한 영상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국민이 지켜보고 있었고, 나는 (항전의) 상징인 만큼 국가원수답게 행동해야 했다”며 “하지만 당시 자리를 이탈한 정부 관리와 군 간부들의 숫자가 많아 놀란 상태였다”고 고백했다. 타임지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들에게도 가족을 피신시킬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며 “대통령이 복귀를 협박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고위 관리들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펠로시 美하원의장, 키이우 찾아가 젤렌스키 만나 -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찾은 낸시 펠로시(왼쪽) 미국 연방의회 하원의장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하원의장은 대통령과 부통령에 이어 연방 정부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자리다. 펠로시 의장은 “우크라이나에 추가 지원이 임박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로이터 연합뉴스

특히 민간인 살상 관련 소식을 접했을 때의 괴로움도 피력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4월 8일 오전 동부 크라마토르스크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피란민 50여 명이 미사일 공격에 희생됐다는 보고와 함께 폭발 충격으로 끔찍하게 훼손된 여성의 시신 사진을 봤던 비통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그날 오후 키이우를 찾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과 EU 신속 가입 절차에 합의하는 중대한 만남이 있었지만, 그 순간에도 시신의 모습이 아른거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