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가오리, 펑솨이

지난 2일 중국 전직 국가대표 테니스 선수 펑솨이(彭帥·35)가 장가오리(張高麗·75) 전 부총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자 외신들이 폭로 배후에 정치 세력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간 중국 학계와 기업, 연예계에서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벌어져 왔지만 장 전 부총리처럼 권력 핵심부 인사에 대한 의혹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장 전 부총리는 시진핑 집권 1기 중국 최고 지도부 가운데 한 명으로, 산둥성·톈진시 당서기(1인자)를 거쳐 2012~2017년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내고 2018년 은퇴했다. 한족이지만 ‘고려(高麗)’란 이름 탓에 ‘한국계’란 소문이 퍼진 적이 있고, 2010년 톈진 당서기 시절에는 방중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직접 맞이해 주목받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일(현지 시각) “장가오리와 같은 고위 지도자에 대한 공개적 비난은 거의 전례 없는 일이지만, 중국 공산당은 실각한 고위 관리들의 성적 비리를 폭로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 상하이방(上海幇) 출신의 저우융캉 전 정치국 상무위원이 몰락할 때도 성적 스캔들이 가장 먼저 터졌다”고 했다. 장 전 부총리는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을 견제하는 장쩌민 전 국가 주석의 계파인 상하이방의 일원이다. 장쩌민의 측근인 리창춘(李長春) 전 상무위원이 그를 선전시 당서기로 중용했고, 이후 장쩌민이 그를 산둥성장 자리에 앉혔다. 후진타오(胡錦濤) 정권 시절인 2006년, 장쩌민이 산둥성 태산(泰山)을 찾았을 때 그는 산 전체를 봉쇄하고 옛 황제의 봉선(封禪) 의식을 연상시키는 예우를 했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오는 8일 중국 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9기 6중전회)와 내년 20차 당 대회를 앞두고 시 주석이 견제 세력 숙청에 나섰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6중전회에서는 시 주석의 역사적 지위를 마오쩌둥(毛澤東)·덩샤오핑(鄧小平) 반열에 올릴 예정이고, 20차 당대회에서는 시 주석의 3연임이 결정된다. 검열 시스템이 가동되는 웨이보에서 중국 최고위층의 실명이 포함된 게시글이 사전 검열 없이 업로드 된 점도 현 지도부가 펑솨이의 폭로를 지원한 증거라는 분석도 나왔다.

프랑스 국제라디오방송(RFI)은 중국공산당 감찰 기관인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장 전 부총리가 장기간 당서기로 재직했던 톈진시에서 발생한 비위 사건 8건을 3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고 보도했다. RFI는 “공개된 사건들은 장 전 부총리가 톈진시를 떠난 직후 적발된 것들이지만, 그가 재임 시절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부동산 개발 관련 사건도 포함됐다”면서 “그를 겨냥한 정치 공격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폭로로 시 주석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란 지적도 나온다. 장 전 부총리가 시 주석 집권 1기에 상무위원을 지냈던 만큼 중국 지도부 전체의 도덕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CNN방송은 “중국 당국은 연예인 대상 미투 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이번 사태 수습에 나섰다”고 했다. 웨이보에서는 ‘장가오리’와 ‘펑솨이’는 물론 ‘테니스’란 단어까지 금지어로 설정됐다. 한국 드라마 ‘총리와 나’(2013~2014년 방영)는 제목이 장가오리 전 부총리 사건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중국 포털 사이트 등에서 검색 금지어에 올랐다.

펑솨이는 지난 2일 밤 10시 7분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 계정에 장 부총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성폭행 고발 글을 게재했다. 그는 장 전 부총리가 톈진시 당서기(2007~2012년)일 때부터 내연 관계였다고 주장하며 2012년 말 장 전 부총리가 상무위원으로 승진하면서 왕래가 끊어졌지만 약 3년 전 베이징에서 그의 집으로 갔다가 강제로 성관계를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장 전 부총리의 자택에서 성폭행당할 당시 그의 아내 캉제(康潔)가 망을 봤다고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