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한 거리에서 선글라스와 히잡을 쓴 여성들이 탈레반에게 여성의 교육 기회 보장과 내각 참여를 요구하는 문구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AP 연합뉴스

미군이 철수한 뒤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여성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무장한 탈레반 대원들이 거리 곳곳에서 감시하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목소리를 낸 것이다.

4일(현지 시각) 알자지라에 따르면 전날 50여 명의 아프간 여성이 수도 카불의 국방부 건물 앞에 모여 거리 시위에 나섰다. 이 중에는 탈레반이 착용을 강제하는 부르카(눈 부위의 망사를 제외하고 머리부터 발목까지 덮는 의상)를 입지 않고, 히잡만 쓴 채 얼굴을 전부 드러내거나 선글라스를 쓴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내각에 여성을 포함하라” “여성의 일할 권리를 보장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대통령궁을 향해 행진했다. 시위에 참여한 한 여성은 “나는 말할 수 없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며 “그들(탈레반)은 아프간이 남성의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틀렸다. 여긴 여성들의 나라이기도 하다”고 했다고 뉴욕포스트는 전했다.

탈레반 앞에서 행진하는 아프간 여성 시위대 - 지난 3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부르카를 입지 않거나 얼굴을 드러낸 여성들이 교육과 취업 등 여성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거리 행진을 하면서 총을 든 탈레반 대원(맨 왼쪽) 앞을 지나고 있다. 시위대 중에는 선글라스를 낀 여성도 보인다. 시위대가 대통령궁 인근까지 행진하자 탈레반은 공포탄과 최루탄을 쏘면서 진압에 나섰다. 탈레반의 위협에도 시위는 확산하는 양상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AFP 연합뉴스

무장한 채 시위를 지켜보던 탈레반은 시위대가 대통령궁에 다다르자 저지하기 시작했다. 현지 매체 톨로뉴스 등에 따르면 탈레반은 최루탄과 공포탄을 발사하며 여성 시위대 해산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한 여성이 탈레반 대원에게 폭행당해서 피를 흘린 채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이 소셜미디어 등에 올라왔다.

탈레반의 삼엄한 경비에도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아프간 여성들의 시위는 점차 확산하고 있다. 지난 2일 아프간 제3 도시 헤라트에서 열린 시위를 시작으로 카불에서도 이미 두 차례 여성 시위가 있었다. AP는 “탈레반이 마지막 통치 시기(1996~2001년) 때보다 포용적이고 온건한 형태의 이슬람 통치를 약속했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은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다”며 “아프간 여성들은 (탈레반이 물러갔던) 지난 20년 동안 얻었던 여성 인권이 후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실제로 탈레반은 지난달 16일 수도 카불을 장악한 뒤 기자회견을 열고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여전히 부르카 착용을 강제하고 취업에도 제한을 두고 있다. 최근에는 아프간 고위급 경찰 간부였던 여성이 탈레반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다는 내용의 증언을 하기도 했다.

3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한 거리에서 여성 시위대 사이로 무장한 탈레반 대원들이 지나다니고 있다/Zaki Daryabi 트위터

한편 간신히 아프간을 탈출해 제3국으로 수송된 피란민들의 안타까운 사연도 속출하고 있다. 4일 가디언은 지난달 23일 부모를 따라 폴란드 바르샤바 인근의 난민 센터로 탈출한 5세·6세 아프간 형제가 독버섯을 먹고 잇달아 사망했다고 전했다. 숨진 형제의 가족들은 난민 센터 인근에서 채취한 버섯으로 수프를 끓여 먹었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센터 측의 열악한 환경이 원인이라는 주장에 마리우스 카민스키 폴란드 내무부 장관은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난민 캠프의 부주의나 과실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