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한국 IT기업 문화에 실망한 청년들이 기업 내부 사정을 고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겉으로 자유롭고 수평적인 분위기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초과 근무를 조장하고 수직적 위계질서가 강한 한국의 일반적인 기업 문화와 다르지 않다는 불만이다.

오세윤 네이버사원노조 ‘공동성명’ 지회장(왼쪽 세 번째)이 지난 6월 7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네이버 그린팩토리 앞에서 열린 ‘동료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노동조합의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10일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IT 기업 직원들이 직장에서 형편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최근 연달아 터진 IT기업의 내부 고발과 불미스러운 사건을 보도했다.

지난 2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카카오 직원으로 추정되는 이용자가 ‘유서’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게 발단이었다. 사내 괴롭힘으로 극단적 선택을 암시한 이 글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회자되며 논란이 됐으나 다음 날 삭제됐다. 이를 계기로 각종 내부 고발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카카오의 인사평가제도에 대한 고발도 그 중 하나였다. 카카오는 다면평가 중 동료평가에서 “이 동료와 다시 함께 일하고 싶습니까?” “회사에 뛰어난 성과를 내야 하는 프로젝트가 있을 때 이 동료와 함께 일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결과를 전사 평균치와 함께 당사자에게 공개한다. 익명의 블라인드 이용자들은 이 같은 인사 평가 제도가 개인에 대한 공격을 조장하고 사내 분위기를 망친다고 주장했다.

4월에는 게임회사 크래프톤에서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발생했다. 일부 직원들은 직속 상사가 “더 쥐어짜야 한다”며 추가 수당 없이 야근을 강요하고 반차 사용을 막았다고 했다. 또 다른 팀장은 한 직원과의 면담에서 윗선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일하는 동안 숨 막히게 만들 수 있다”고 협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크래프톤 직원들은 이 같은 내용을 회사 인사팀에 신고하는 한편 서울동부고용노동지청에 진정서를 냈다.

네이버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5월 40대 네이버 직원이 직장 내 괴롭힘과 업무상 스트레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네이버 노동조합은 지난 5월 28일 “고인이 생전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와 위계에 의한 괴롭힘을 겪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사실로 밝혀진다면 명백한 업무상 재해”라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달엔 이커머스 업체 쿠팡의 이천 물류센터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 진압 과정에서 소방관 1명이 순직하며 회사가 평소 안전 관리에 소홀했다는 비판이 일었고, 이는 쿠팡 불매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코노미스트는 “쿠팡은 물류·배달 직원들의 열악한 근무 여건 탓에 비판받던 기업”이라며 “사무직 직원들조차 고압적인 상사와 제멋대로인 회사의 의사 결정 방식에 불만을 표한다”고 했다.

카카오 판교사옥에 마련된 7층과 8층을 잇는 ‘소파계단’/ 조선DB

이코노미스트는 “네이버, 카카오, 쿠팡 등 한국의 IT 기업들이 미국 실리콘밸리의 선구자들을 표방하며 성과주의와 ‘빈백(bean bag 쿠션이 있는 편안한 의자·)’으로 상징되는 자유롭고 수평적인 분위기를 내세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 일터와 상사들이 수직적 위계질서와 초과 근무를 강요하는 기존 기업 문화에서 그렇게 진일보하지 못했다는 걸 보여준다”고 했다.

한 대형 IT 기업에 다니는 박해령(26·익명)씨는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회사는 수평적 조직 문화와 유연하고 젊고 혁신적인 직장을 약속했지만, 현실은 다르다”며 “일의 체계나 소통이 없고 엄청난 양의 일을 혼자 떠안아야 하는데, 인사팀에 불평할 수 조차 없다. 인사 담당자가 대표와 대학 친구 사이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하루라도 빨리 퇴사할 계획이다. 그는 “많은 동료들도 같은 생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