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엘살바도르가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자국 법정 통화로 채택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은 5일(현지 시각)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열린 ‘비트코인 2021 콘퍼런스’에 화상(畫像)으로 참석, 비트코인을 법정 통화로 지정하는 법안을 7일 의회에 제출한다고 밝혔다. 부켈레 대통령이 이끄는 여당 ‘새로운 생각’은 의회 과반을 장악하고 있어서 법안 통과 가능성이 크다.

부켈레 대통령이 비트코인을 법정 통화로 채택하려는 이유는 해외 이주 노동자들의 국내 송금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로이터통신은 분석했다. 1980~1992년 내전 여파로 주요 산업 기반이 파괴된 엘살바도르는 국내총생산(GDP)에서 이주 노동자의 송금액이 2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껏 이주 노동자들은 해외 은행에 10%에 달하는 송금 수수료를 지불해왔다. 송금 완료까지 며칠이 걸리는 경우가 잦았다. 비트코인은 수수료 없이 실시간 전송이 가능하다.

엘살바도르는 1980년대 내전을 거치면서 급격히 몰락한 나라다. 미국 지원을 받는 보수 우파 정권과 쿠바 지원을 받는 좌파 민족해방전선(FMLN) 무장단체가 1980년부터 12년간 내전을 벌여 주요 산업 기반이 파괴됐다. 이 과정에서 국민 100만명이 해외로 도피했고 범죄 조직은 덩치가 커졌다. 내전 이후에는 커피·설탕 등 소수 품목에 의존하는 단순한 수출 구조, 빈약한 제조업, 치안 불안으로 인한 저조한 국내외 민간 투자로 경제 성장의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 현재 엘살바도르의 1인당 GDP는 한국의 8분의 1 수준인 약 4200달러(468만원)에 불과하다. 국민 3분의 1은 빈곤층이다. 국민 대다수는 미국 등 해외에 불법 체류하는 가족들이 보내오는 돈에 의존해 살아간다.

미국 달러를 2001년부터 공식 화폐로 사용해 왔지만 외국 자본 유치 효과가 미미했던 점도 비트코인 도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화폐 가치 급락을 우려해 자체 화폐 제작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현금 위주의 엘살바도르 경제를 뜯어 고치겠다는 의도도 있다. 엘살바도르 인구 645만 중 70%가 은행 계좌나 신용카드 없이 현금 거래만 하고 있다.

부켈레 대통령은 이미 지난 3월 암호 화폐 서비스 업체 ‘스트라이크’와 손잡고 소도시 엘존테를 ‘비트코인 마을’로 운영하는 실험에 착수했다. 이 마을 주민들은 휴대폰 앱을 이용해 현금을 비트코인으로 환전했다. 버스를 타거나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비트코인으로 결제했다. 스트라이크 창업자인 잭 말러스는 5일 “암호 화폐를 법정 통화로 채택하면 엘살바도르는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이며 세계와 연결된 결제 네트워크를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엘살바도르에서 비트코인이 법적 결제 수단으로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우려도 나온다. 변동성이 큰 탓에 화폐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엘살바도르의 대규모 범죄 조직들이 비트코인을 적극 이용해 정부의 자금 추적을 어렵게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