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운구 행렬이 11일(현지 시각)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메르켓 크로스를 지나고 있다. 거리 좌우를 가득 메운 영국인들이 여왕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 4일째인 11일(현지 시각) 오후, 런던 버킹엄궁 주변에는 수천여 명의 조문객들이 몰려들었다. 그린파크 지하철역에서 궁으로 이어지는 600여m의 공원 길과 트라팔가르 광장에서 궁으로 이어지는 약 1.3㎞의 ‘더 몰’에는 추모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장례식 날인 19일까지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버킹엄궁 일대를 찾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런던 경찰은 궁으로 향하는 길에 바리케이드와 통제선을 설치해 안전사고에 대비했다.

버킹엄궁 앞에는 담장을 따라 꽃과 편지가 수북이 쌓여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여왕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애도의 뜻을 담은 글을 쓰는 사람 외에도 새로 등극한 찰스 3세를 볼 수 있을지 자리를 지키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블랙모어(43)씨는 “여왕은 대영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의 고통과 실망을 (영국인들이) 감내하고 버티게 해준 정신적 지주였다”며 “개인적인 추모의 시간을 갖고, 또 아이들이 이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게 하려고 일부러 왔다”고 했다.

영국은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10%대로 치솟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임금 상승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연쇄 파업,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국가 경쟁력 하락이 겹치면서 최근 수십년간 겪어보지 못한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지난 70년간 국민적 존경을 받아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자 영국인들은 당장의 갈등을 잠시 뒤로 한 채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평생을 “영국과 영국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다”던 96세 노(老)여왕을 위한 마지막 선물인 셈이다.

영국 정부는 지난 8일(현지 시각) 여왕 서거 소식을 전하며 이달 26일까지를 추모 기간으로 정했다. 장례식 당일인 19일만 공휴일로 정했을 뿐, 민간 부문에 대해서는 특별한 제약 없이 각자의 결정에 따라 추모하도록 정했다. 총리실은 “국가 추모 기간에 사업장을 중단하는 등 의무는 전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영국 사회 각계에선 예정된 행사나 정치적 움직임을 자제하며 일제히 추모 분위기에 동참하고 있다.

영국 우체국 노동자 11만5000명이 가입한 통신노조(CWU)는 서거 당일부터 9일까지 이틀간 예정된 파업을 전격 중단했다. CWU는 “국가를 향한 헌신과 왕실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계획된 (9일) 파업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철도 노동자 4만명이 가입한 철도해상운송노조(RMT)도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이달 15일과 17일, 26~27일 계획했던 파업을 취소했다. RMT는 “여왕에 대한 국가적 존경에 동참하며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파리와 런던을 오가는 유로스타 등 취소됐던 일부 열차 편의 예매가 재개됐다.

잉글랜드 축구 프리미어리그는 “여왕의 특별한 삶과 국가를 향한 공헌을 기념하고 존경하기 위해, 12일까지 경기를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8일 개막한 BMW PGA 챔피언십 대회는 첫날 여왕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 뒤 72홀에서 54홀로 축소해 진행됐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는 크리켓 경기가, 북아일랜드에서는 지난 주말 예정된 축구와 럭비 경기가 취소됐다. 뉴욕·밀라노·파리와 더불어 세계 4대 패션쇼로 불리는 런던패션위크도 행사를 대폭 축소했다.

영국에서 분리독립하겠다며 국민투표를 추진해온 스코틀랜드 정치권은 여왕 서거를 맞아 정쟁을 자제하는 모양새다. 니컬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은 “여왕이 사랑했던 밸모럴성을 최종적으로 떠나는 슬프고 가슴 아픈 순간”이라며 “마지막 여정에 나서는 여왕에게 스코틀랜드는 조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북아일랜드에서도 친영파와 친아일랜드파 간 갈등을 뒤로하고 여왕 추모에 동참했다. 이들은 브렉시트 이후 EU인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에 끼여 어느 쪽과 자유로운 왕래와 교역을 우선시할지를 놓고 다툼을 벌여왔다. 북아일랜드 현지 자치의회는 성명을 통해 “여왕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역 사회 속에 기억될 것”이라고 추모했다.

일각에서는 영국이 브렉시트 이후 보리스 존슨 총리의 낙마로 인한 새 총리 임명, 정신적 지주였던 여왕의 서거까지 3대 악재를 맞았지만, 찰스 3세가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여왕을 잃은 상실감을 공유하며 묵묵히 힘을 모으고 있다. 버킹엄궁 앞에서 만난 케임브리지대 학생 몰드윈(23)씨는 “여왕은 현대사의 수많은 고비를 특유의 인내와 헌신으로 버텨왔다”며 “그 결과가 어떻든, 우리 (영국인) 역시 침착하게 할 일을 해낼 것(Keep calm and carry on)”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