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연방의회에서 “앞으로 1000억 유로(134조원)의 특별 기금을 조성해” 군(軍)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GDP의 2% 이상을 국방비에 쓰겠다고 선언했을 때, 의원들은 기립박수를 쳤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3일 뒤였다. 독일 언론∙씽크탱크에선 숄츠의 ‘재무장’ 선언을 놓고 독일 외교∙안보의 ‘역사적 전환점(Zeitenwende)’ ‘혁명’이라는 평가가 따랐고, 독일인의 78%도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사실 인구 8300만 명인 독일의 작년 국방비는 469억3000만 유로(약63조1000억원)로 결코 적지 않다. 같은 해 우리나라 국방비(52조9000억원)보다 많아, 독일의 국방비는 전세계 6위다. 그런데도, 많은 돈이 법률 조언∙국방산업체의 민영화 작업 등에 들어가, 독일군에는 50년 된 전투차량, 40년 된 전투기가 여전히 많다.

독일군의 장비와 전투태세는 미국은커녕, 유럽의 주요 나토(NATO) 동맹국들과 비교해도 형편없이 뒤처진다. 그래서 1000억 유로의 특별 기금이라 해도 “첨단 신무기 배치는커녕, 다른 나토 동맹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에 급급한 금액”이라는 평가가 많다.

◇1991년 국방예산만 유지했어도 누적 4500억 유로

냉전(冷戰) 시절 50만 육군이었던 독일은 1991년 냉전이 끝나면서 급속히 무장해제를 했다. 1990년 재통일 이후, 전투기의 63%, 전함의 68%, 탱크의 94%를 없앴다. ‘평화 배당금(peace dividend)’에 푹 빠졌다. 작년 가을 독일 총선에서도 안보는 전혀 이슈가 되지 않았고, 러시아 미사일이 독일을 공격한다는 생각은 터무니없게 여겼다. 이제 독일군 병력은 18만3000명으로 줄었다. GDP 대비 국방예산 비중은 1963년 최고 4.9%에서 1.5%로 떨어졌다.

그나마 적지 않은 돈이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곳에 쓰이면서, 현대 독일군의 무전 장비는 30년 된 것이고, 전함 세 척 중 한 척만 항해할 수 있다. 일부 장갑차량은 50년이 넘었다. 독일군의 분쟁지역 평화유지 파병도 전투가 아니라 정찰∙병참 지원∙훈련에 주력했다. 1000억 유로가 막대한 돈이지만, 사실 독일이 1991년 국방 예산만 유지했어도 지금까지 4500억 유로(약 604 조원)를 추가로 더 썼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독일 육군참모총장 “41년 군복무에 전쟁 생각한 적 없다”

알폰스 마이스 독일 육군 참모총장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던 지난달 24일 소셜미디어 링크드인에 독일군의 참담한 현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수십 년에 걸친 군에 대한 방기(放棄)에 지쳤다. 41년 복무하면서, 내가 전쟁을 경험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지휘하는 분데스베어(Bundeswehr∙연방방위군)는 빈 손이다. 동맹을 돕기 위해,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극도로 제한돼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독일 정부는 “헬멧 5000개를 보내겠다”고 해서 국제사회의 조롱을 받았지만, 그게 독일군의 현실이었다. 독일 정부가 8년 동안 콘테이너에 보관했다가 우크라이나에 보낸 소련제 스트렐라 대공 로켓 2700기는 3분의1이 사용 불능이었다. 독일군 장군들은 “유럽의 동부 국경은 고사하고, 독일도 못 지킬 상황”이라고 한탄했다.

◇독일군 주둔한 나토 동맹국 리투아니아 “진짜 군인 좀…”

영국 더타임스는 독일군에 내려오는 오랜 조크를 소개했다. 공중에서 낙하 훈련하는 병사에게 지휘관은 “먼저 주(主)낙하산을 당기고 작동하지 않으면 보조낙하산을 당겨라. 지상에서 트럭이 픽업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주∙보조 낙하산 모두 펴지지 않았고, 곧 죽게 된 독일 병사는 “이런 망할! 저 밑에 트럭도 없을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2014년 노르웨이에 열린 나토군의 신속대응 훈련에 참가한 독일군은 기관총이 없어서, 빗자루의 나무스틱을 검게 칠해 장갑차량에 장착했다. /자료사진

2020년 독일 신문 빌트는 “전투차량 푸마(Puma) 대수가 부족해, 군인들이 신속한 탑승∙하차 훈련을 일반 승용차로 한다”고 보도했다. 또 2014년 9월 노르웨이의 나토군 신속대응군 훈련에 참가한 독일군 GTK 복서(Boxer)장갑차량은 기관총이 없어서 빗자루 스틱을 검게 칠해 ‘장착’한 사실이 나중에 알려져 조롱거리가 됐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주변국에는 나토군이 대거 배치됐다. 폴란드∙라트비아∙에스토니아에는 나토 소속의 미군∙캐나다군∙영국군이, 리투아니아에는 독일군이 배치됐다. 리투아니아 안보국방위원장은 뉴욕타임스에 “독일군도 좋은데 진짜 군인(real soldiers)를 보내달라” “전투할 수 있고, 영구 주둔할 수 있는 미군이 왔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독일 의회 국방위 소속인 에바 회글 의원은 지난 15일 리투아니아 파병 독일군의 상태를 진단하는 보고서를 냈다. “방한 재킷도 없고, 몸을 따듯하게 할 속옷도 부족하다.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 중 하나인 독일의 군대가 이럴 수가 있느냐”고 비판했다. 2017년 독일 국방부는 당시 244대에 달하는, 독일 기술이 집대성됐다는 레오파르트 2 탱크 중에서 “절반 이상이 ‘부품 부족으로 수리 대기 중이라,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은 95대”라고 밝히기도 했다.

숄츠 총리가 지난달 독일의 ‘재무장(rearmament)’를 선언하면서 “날 수 있는 비행기, 떠 다닐 수 있는 배, 임무를 최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장비를 갖춘 병사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1000억 유로라 해도, 제대로 된 무기∙장비 갖추는데 우선 쓰다 보면

독일은 우선 병력 수를 늘일 계획이다. 독일 국방부는 공영 TV인 ZDF에 현재보다 2만 명 많은 20만3000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독일의 군사 전문가 토마스 비골드는 더타임스에 “이 돈으로 다양한 능력을 갖춘 독일군 병력을 증강하기는커녕 다른 나라를 쫓아가기도 바쁘다”고 진단했다. ‘미래 무기’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지난 30년 평화주의에 취해 망가진 독일군을 보수하는 비용에 그칠 것이라는 얘기다.

또 ‘특별 기금’ 1000억 유로도 사실 현재 1.5%인 GDP 대비 국방비 비중을 앞으로 5년간 GDP의 2%까지 올리기 위해 부족분을 채우다 보면 없어진다. 이후엔 대책도 없다. 따라서 1000억 유로는 대규모 투자라기보다는 파산 직전의 구제금융에 가깝다는 것이다.

독일군의 잠수함(6척)∙전투기∙전투차량의 절반 이상은 지금 당장이라도 폐기 처분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한다. 일부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한다. 서방의 군사 전문가들은 독일 정부가 1000억 유로를 △F-35 전투기 35대 △로켓포∙총탄∙수류탄 비축 △대형 수송헬기 교체 △신형 전투차량을 구입하는데 우선적으로 쓰고, 이밖에 이동형 대공 미사일 시스템과 공격용 드론 등을 구입할 것으로 본다. <표 참조>

영국 워릭 대학교의 전쟁학 전공인 게오르그 뢰플만 교수는 “현재 독일군의 탄약고는 우크라이나 같은 전쟁을 하면 2~3일 내 소진된다”고 말했다. 그는 “1000억 유로로 갑자기 ‘터미네이터’ 같은 독일군이 나오지는 않는다”며 “다만 지금까지는 서류로만 가능하다고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군대, 원래 역할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군대를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레이저 건(laser gun)이니 하이퍼소닉(hypersonic∙극초음속) 미사일이니 하는 첨단 무기들은 ‘기본’을 갖춘 다음에 고려할 수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