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000억 유로(약 134조4000억 원)의 추가 국방기금 조성, 우크라이나에 대한 스팅어 대공(對空) 미사일‧대(對)전자 미사일‧독일제 무기 공급, F-35 스텔스 전투기 구입…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외교 정책은 신중함과 점진성을 중시하며, 러시아와 서방 간 대화와 균형을 강조했다. 그러던 독일이 지난 1주일 새 기존 군사‧안보 정책을 완전히 뒤집으며, 국방력 강화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내 책임있는 파트너의 역할을 강조하고 나섰다. ‘나치 독일’이라는 역사적 부담에 눌렸던 독일이 러시아와의 대결 구도로 코스를 변경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정책 혁명”이라고 평했다. 온갖 외교적 협상 노력을 무시한 푸틴의 무모한 우크라이나 침공이 독일을 깨웠다.

◇ 독일 총리 “2월24일은 유럽 역사의 전환점”

사민당(SPD) 소속인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달 27일 연방의회 특별회의에서 독일 국방정책의 혁신을 발표했다. 그는 “2022년 2월24일(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일)은 유럽 대륙의 역사에서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며 “지금의 사안은 무력이 법을 짓밟게 할 것이냐, 푸틴이 시침(時針)을 19세기 강대국 정치 시절로 되돌리게 할 것이냐. 아니면 우리가 푸틴과 같은 전쟁광에 제한을 가할 것이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독일 연방의회 특별 회의에서 전후 독일의 국방-안보 정책의 혁신적 U턴을 발표하는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AP 연합뉴스

숄츠 총리는 이날 독일 국방비를 올해부터 전체 GDP의 2%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이를 위해 1000억 유로의 국방 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독일은 다른 나토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2014년 ‘10년 내 GDP의 2%로 국방비 확대’를 약속했지만, 2020년 독일 국방비는 GDP의 1.4%로 목표치와는 거리가 멀었다(미국은 3.74%).

숄츠는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의 정치‧안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독일에게 국가적 노력을 요구하는 전환점”이라며 “더 이상 발사 안되는 총, 날지 못하는 전투기, 항해하지 못하는 전함으로 독일군을 무장하지 않겠다” “이는 우리 자신의 안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독일은 올해 조성되는 1000억 유로의 기금으로 애초 구입 예정이었던 F/A-18 호닛 전투기 대신에 F-35 스텔스 전투기와 이스라엘제 드론을 구입한다.

지난달 14일 독일군의 자주포 6대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발트해 리투아니아의 나토 전진기지에 배치되기 위해 뮌스터항에서 대기하고 있다. 독일은 모두 9대의 자주포를 리투아니아로 보낸다./AFP 연합뉴스

전날 26일엔 수십 년간 고수했던, 분쟁 지역으로 독일 소유 및 독일산 무기를 보내는 것을 금지하던 정책을 포기했다. 독일 정부는 네덜란드 정부가 독일군의 휴대용 대전차 유탄발사기(RPG) 400정을 보내는 것을 허용하고, 자국에서 스팅거 대공 미사일 1000기, 대전차 미사일 500기를 우크라이나에 보내기로 했다.

독일정부는 1월27일 우크라이나에 군용 헬멧 5000개와 야전병원 시설을 보내겠다고 해서, 우방국들로부터 “농담하느냐”는 조롱을 받았다. 이 헬멧도 무려 한달이 지난 2월26일에야 트럭 2대에 실려 우크라이나에 도착했다.

◇독일 국내 경제 부담에도, 러시아와 ‘대결’ 선택

독일 정부는 26일, 또 각국 은행간 국제금융결제망(SWFIT)에서 러시아 은행들을 축출하는 것에 대한 반대도 접었다. 22일에는 110억 유로짜리 노르트스트림 2 가스관의 인증 과정을 무기한 중단시켰다. 또 에너지 수입선을 다변화하기 위해, 2개의 액화천연가스(LNG) 터미널을 “가급적 빨리” 짓겟다고 발표했다.

러시아는 독일에게 EU 밖 무역거래국으로 톱5위에 드는 국가다. 작년 두 나라간 무역액은 전년보다 34%가 증가해 600억 유로에 달했다. 그러나 독일 사민당 정부는 러시아 경제 제재로 인해 독일 경제가 입을 타격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고립시키고 유럽 최대의 국방예산국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 “숄츠, 더 이상 다른 나라가 제공하는 안보와 에너지 즐기지 않겠다”

27일 베를린 시민 50만 명은 베를린에서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다. 전후 사민당은 특히 유럽에서 러시아를 배제하는 ‘위험성’을 강조해 ‘협상’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대량 난민 사태는 독일인에게 2차 대전 당시 러시아의 붉은 군대를 피해 고향을 등져야 했던 독일의 과거를 연상시켰다.

2월27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며 베를린 시내에 모인 50만 명의 독일인들. /AP 연합뉴스

또 26일 리투아니아 대통령과 함께 숄츠 독일 총리를 만난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독일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러 왔다”고 트위터에 썼다. 러시아가 침공을 하자, 독일의 우방국들은 독일 정부가 독일과 유럽을 지키려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오픈소사이터재단의 유럽‧유라시아 부문 책임자인 다니엘라 슈와처는 뉴욕타임스에 “27일 숄츠 총리의 의회 연설은 독일이 더 이상 느긋하게 물러앉아서, 다른 나라들이 제공하는 안보(미국)와 천연가스(러시아)를 즐기고만 있지는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며 “전략적으로 자리매김을 새로 한 것”이라고 평했다.

◇ 1주일 새 돌변한 배경

존스홉킨스대 현대독일연구소의 제프 랫키(Rathke) 소장은 포린 폴리시에 “가장 큰 이유는 푸틴의 뻔뻔한 우크라이나 침공과 잔인성”이라고 꼽았다. 숄츠는 2월15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막바지 외교적 노력을 했지만, 푸틴은 외교적 해법을 원치 않았다.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했던 1‧2차 민스크협정도 무시하고, 아예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親)러 반군 장악 두 곳을 ‘국가’로 일방적으로 승인했다. 푸틴의 침략은 독일 정부에겐 당혹스러운 일이었고, 결국 숄츠 총리는 독일이 나토에서 완전히 신뢰할만한 파트너가 되는 미래 청사진을 제시했다. 마침 사민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는 가치지향적 녹색당, 자유민주당도 모두 러시아에는 강경노선을 취한다. 러시아의 얼토당토한 침략 구실 앞에서, 게르하르트 쉬뢰더 전(前)총리와 같이 사민당 내 ‘러시아 대화파’는 힘을 잃었고 나아가 당에 정치적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됐다.

◇ ‘강요’ 안하고 ‘내부 변화’ 기다린 바이든 행정부

독일의 대(對)러시아 온건 노선에 대해선 미국 의회와 미디어에서도 비난이 거셌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독일의 러시아 정책 변경은 워싱턴의 강요가 아니라, 독일 내부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믿었고 기다렸다.

지난 2월7일 숄츠 총리가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에, 기자들은 “독일이 신뢰할만한 파트너냐. 미국의 신뢰를 다시 얻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양국 정상에게 따져 물었다. 바이든은 “독일은 미국의 신뢰를 다시 얻을 필요도 없고, 우리는 숄츠 총리를 완벽히 신뢰한다”고 옹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