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친골라니 이탈리아 생태전환부 장관. /EPA 연합뉴스

1990년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전면 중단한 ‘탈원전 1세대 국가’ 이탈리아에서 원전을 다시 도입하자는 주장이 정부 내에서 제기됐다. 이탈리아는 G7(주요 7국) 중 원전을 전혀 가동하지 않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이 때문에 에너지 수급에 애를 먹고 있으며 유럽 국가 중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다. 특히 이번에 원전 재도입을 주장한 사람이 우리의 환경부에 해당하는 생태전환부의 장관이어서 주목받고 있다. 환경을 책임지는 장관이 이례적으로 원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탈리아 안사통신에 따르면 로베르토 친골라니 이탈리아 생태전환부 장관은 지난 1일 중도 정당 이탈리아비바(IV)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원전 재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친골라니 장관은 “농축 우라늄과 중수(重水)를 사용하지 않고 가동할 수 있는 4세대 원전 기술 개발이 무르익고 있다”며 “(4세대 원전이) 방사성 폐기물이 적게 나오고 안전성이 높으며 비용이 낮다는 것이 검증된다면 이런 기술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이런 기술에 대해선 이념화하지 말고 (과학적) 사실에 집중하자”고 했다.

물리학 박사인 친골라니 장관은 이탈리아의 대표적 국책 연구 기관인 이탈리아기술연구소(IIT)에서 2005년부터 14년간 과학 분야 최고책임자를 지냈다. 그는 “과격한 환경주의자들이 기후변화보다 위험하다”고 주장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탈리아 전력 생산 시 에너지원별 비율

친골라니 장관이 언급한 4세대 원전은 소듐냉각고속로, 초고온가스로 등의 기술을 적용해 고효율과 높은 안전성을 확보하고 방사성 폐기물을 최소화해 환경 친화적이라는 특성이 있다. 미국·중국·프랑스 등 전 세계 주요국이 2030년쯤 상용화하는 것을 목표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친골라니 장관이 최근 원전 재도입을 주장한 배경에는 탈원전 이후 이탈리아가 겪는 고질적인 에너지 수급 불안 문제가 깔려 있다. 이탈리아는 2018년 기준 전기 43.9TWh(테라와트시)를 수입해 유럽에서 전기 수입량이 가장 많은 나라다. 전체 전력 중 45.6%를 가스에 의존해 생산하고 있는데, 러시아·알제리 등에서 천연가스를 수입하느라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신재생에너지 도입을 서두르고 있지만 효율이 낮아 주력 에너지원으로 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체 전력원 중 태양광 비율이 유럽에서 가장 높지만 9.7%(2020년)에 그친다. 유럽에서 ‘태양광 1등 국가’라며 자부하고 있지만 태양광으로 전체 전력의 10분의 1밖에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는 원전을 가동하는 이웃 국가 프랑스·스위스 등에서 전기를 수입해 쓰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체 전력 공급량의 16%를 수입에 의존한다. 세계원자력협회(WNA)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실제 소비되는 전력의 7%가량이 프랑스·스위스의 원전에서 만들어져 국경을 넘어온다. 탈원전을 했지만 실제로는 적지 않은 양의 원전발 전기를 쓰는 처지인 것이다. 이탈리아의 가정용 전기 요금은 프랑스보다 10% 비싸다.

이탈리아인들은 체르노빌 사고(1986년), 후쿠시마 사고(2011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탈리아는 원전 초창기에는 선도적인 기술이 앞선 나라였다. 2차 대전 직후인 1946년 정부가 원전 연구 기관을 설립했고 1960년대 초반부터 원전에서 전기를 생산했다. 하지만 체르노빌 사고가 발생하자 원전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1987년 국민투표를 거쳐 원전을 멈추기로 했다. 이후 3년 만인 1990년 모든 원전의 가동을 중단했다. 이탈리아보다 7년 앞서 1980년 국민투표로 탈원전을 결의한 스웨덴이 에너지 수급을 고려해 아직도 원전에 30%를 의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이탈리아는 탈원전을 속전속결로 끝냈다.

그러나 이후 전력 공급이 부족하고 수입에 의존하는 현상이 뿌리내리면서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2008년 이탈리아 정부는 2030년까지 전체 전력의 25%를 원전에서 생산하자며 재도입을 추진했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다시 국민투표를 실시해 논의를 중단시켰다. 따라서 친골라니 장관은 10년 만에 원전 재도입 논의를 다시 점화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친골라니 장관의 제안에 대해 찬반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극우 성향의 동맹당 대표인 마테오 살비니 전 부총리는 “원전만큼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원은 없다”고 찬성했다. 세계적인 자동차 브레이크 제조 업체인 브렘보의 알베르토 봄바세이 회장은 “친골라니 장관의 원전 재도입 주장은 미래를 내다보는 아름답고 고무적인 제안”이라고 했다.

그러나 생태주의를 강조하는 포퓰리즘 성향의 원내 1당 오성운동이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오성운동은 친골라니 장관을 즉각 해임하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총리가 이끄는 현 이탈리아 내각은 좌우 정당들이 대부분 참여한 거국 내각이다. 태양광 업체들을 비롯한 일부 신재생에너지 업계도 원전 재도입 논의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친골라니 장관은 “정책적으로 원전 재도입을 추진하겠다는 게 아니라 관련 분야 학생들에게 개인적 의견을 이야기한 것”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고질적인 에너지 수급 불안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고, 원전이 탄소 배출이 없는 친환경 에너지라는 장점이 부각되고 있어 논의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전망이다. 또한 친골라니 장관이 4세대 원전 기술에 주목한 것은 미래의 과학 연구 분야이기 때문에 낙오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가 깔려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