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독립 30주년 행사 참석한 젤렌스키 대통령 -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독립기념일인 24일(현지 시각) 수도 키예프의 독립광장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오른쪽) 대통령이 연단에서 연설하고 있다. 전날 젤렌스키 대통령은 2014년 러시아가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의 수복을 위해 국제회의 ‘크림 플랫폼(Crimea Platform)’을 출범시켰다. 젤렌스키는 “크림반도를 되찾아올 때까지 이 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겠다”고 했다. /EPA 연합뉴스

23일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가 국제 외교의 중심 무대였다. EU를 중심으로 44국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폴란드의 안제이 두다를 비롯한 대통령 9명, 스웨덴의 스테판 뢰벤을 필두로 총리 4명, 독일의 하이코 마스 등 외무장관 14명이 키예프에 집결했다. 영국·포르투갈은 국방장관이, 미국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특사인 제니퍼 그랜홈 에너지부 장관이 대서양을 건너 날아왔다. 일본·호주 등 7국은 대사를 참석시켰다. 한국은 이 회의에 초대받았으나 불참했다.

미국, 영국, 독일 등 세계 주요국 대표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이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다. 젤렌스키는 이날 44국 대표들을 모아 ‘크림 플랫폼(Crimea Platform)’이라는 국제회의를 출범시켰다. 우크라이나 역사상 전례 없이 방대한 규모의 국제회의였다. EU(유럽 연합)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2인자도 참석했다.

23일 러시아에 맞서는 '크림 플랫폼'이라는 국제회의를 수도 키예프에서 개최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앞줄 가운데) 우크라이나 대통령./타스 연합뉴스

젤렌스키가 ‘크림 플랫폼’을 창설한 이유는 명확하다. 2014년 러시아에 빼앗긴 크림반도를 되찾아오는 것을 목표로 서방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1991년 8월 24일)로부터 30주년을 맞은 시기에 ‘크림 플랫폼’을 출범시켰다. 젤렌스키는 “크림반도를 되찾아올 때까지 이 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겠다”고 했다. 참석한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을 위해 필요한 공동의 외교적 노력을 환영한다”는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크림반도를 빼앗긴 이후로도 우크라이나는 동부 지역에서 러시아 지원을 받는 반군과 7년째 교전을 벌이고 있다.

‘크림 플랫폼’은 젤렌스키의 대외 전략이 집대성된 결정체다. 2019년 코미디언 출신으로 정치 경험 없이 대통령에 당선된 젤렌스키는 예상을 뛰어넘어 외교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끊임없이 러시아의 위협을 받는 우크라이나를 지켜내기 위해 국제 무대에서 우군을 끌어당기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젤렌스키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국가 지도자가 됐다. 17세부터 TV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젤렌스키는 배우·프로듀서·연예 기획사 대표 등으로도 활약했다. 특히 2015년 ‘국민의 종(從)’이라는 드라마 덕에 국민 배우로 떠오르면서 대선 승리까지 이어졌다. 이 드라마에서 젤렌스키는 역사 교사 출신 사회 운동가로서 부패 정치인을 척결해 대통령에 당선되는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우크라이나의 암울한 현실을 통쾌하게 풍자한 이 드라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젤렌스키는 2017년 드라마 제목과 같은 ‘국민의 종’이라는 이름의 정당을 창당했다. 2년 뒤에는 실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드라마 후광 덕에 권력을 쥔 젤렌스키가 정치·행정 경험 없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 우려가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국제 무대에서는 반(反)러시아 정서를 활용해 우크라이나를 방어하는 지략을 발휘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오는 31일 젤렌스키의 미국 방문은 그가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는 정치인이 됐음을 의미한다. 그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 이어 유럽 정상으로는 두 번째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보다도 빠르다.

러시아가 2014년 강제 합병한 크림반도

젤렌스키는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필요로 하는 서방 국가들에서 실리를 얻어내고 있다. 지난달 젤렌스키는 베를린을 방문해 메르켈 총리에게서 백신 150만회분을 얻어냈다. 앞서 지난 3월에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1억2500만달러(약 1500억원)의 군사 지원을 받아냈다. 젤렌스키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지원해달라”며 미국에 으름장을 놓은 게 효과를 봤다.

독일·러시아 간 천연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2’가 완공을 앞두자 이를 견제하고자 젤렌스키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노르트스트림2가 가동되면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관통해 서유럽으로 가는 기존 가스관의 가치가 떨어진다.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도 높아지고 연간 3조원대인 천연가스 통관 수수료 수입이 줄어들 수 있다. 위기를 느낀 젤렌스키는 독일을 압박해 22일 메르켈에게서 “노르트스트림2를 러시아가 무기로 활용하면 제재를 가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지난 4월 정부군과 친러 반군과의 교전이 격화하자 젤렌스키는 군복을 입고 격전지를 방문하는 강단 있는 모습도 보여줬다.

젤렌스키의 ‘적의 적은 친구’라는 원리를 활용하는 실용주의 외교 노선을 지향한다. 대표적인 게 폴란드와의 관계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는 잦은 전투를 벌인 앙숙 관계다. 양국에는 서로 적대적인 국민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젤렌스키는 반러 정서를 공통 분모로 폴란드에 화해 제스처를 내밀며 다가가고 있다. 지난 5월 젤렌스키가 바르샤바를 방문해 우의를 다졌다. 폴란드는 젤렌스키의 숙원인 우크라이나의 EU 및 나토 가입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젤렌스키에게도 과제는 많다. 친러 반군과의 내전이 종료될 기미가 없다. 정부 내 만성적인 부정부패도 근절되지 않았다. 오랜 내전 탓에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며 구호 물품에 의지하는 국민이 많다는 것도 젤렌스키가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