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민당이 보이지 않는다.”

독일에서 9월 26일 치를 예정인 총선이 5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선거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지만 독일 좌파 진영의 터줏대감인 사민당이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158년 역사 사민당이 좌파의 주도권을 녹색당에 빼앗기고 뒷방으로 밀려난 형국이다. 오는 9월 총선은 16년간 장기 집권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물러나고 후임 총리를 선출하는 무대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주요 정당의 총리 후보가 확정된 20일(현지 시각) 여론조사 기관 포르자가 ‘이번 일요일이 총선이라면 누구한테 투표하겠느냐’고 물은 결과 28%가 녹색당, 21%가 여당인 기민·기사당 연합이라고 응답했다. 사민당을 찍겠다는 응답은 13%에 그쳤다. 지난해부터 실시되는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사민당은 3위에 머무르고 있다.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독일인들이 사민당을 더 이상 수권 정당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좌파의 중심축이 사민당에서 녹색당으로 옮겨가는 흐름이 나타난다.

사민당 깃발

사민당은 1863년 창당했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체로 사회민주주의를 확산시키며 유럽식 중도좌파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2차 대전 이후 중도우파인 기민·기사당 연합과 정권을 주고받아 왔다.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 세 총리를 배출하며 20년간 집권했고, 정권을 잃은 기간에도 굳건한 제1 야당이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1970년 12월 비가 내리는 가운데 독일 나치 정권의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그는 1949년 서독 정부 수립 이후 첫 사민당 소속 총리였다.

1960년대 이후 메르켈 총리에게 정권을 내준 2005년까지 13번 총선을 치르는 동안 사민당이 200석 이하로 떨어진 건 193석을 얻은 1987년 총선 한번 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9년 총선에서 146석밖에 얻지 못하며 참패하더니 이후 몰락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17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득표율 20.5%로 기민·기사당에 이어 2위를 하며 153석을 얻었는데, 슈뢰더 전 총리가 정권을 가져온 1998년 총선과 비교하면 득표율과 의석이 절반 수준이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2016년 서울에서 열린 조선일보의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서 ‘동북아 평화 번영의 리더십’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사민당 소속으로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독일 총리를 지냈다./김지호 기자

사민당이 무너지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메르켈 총리가 인기를 얻으며 우파가 장기 집권하는 사이 쇄신하는 좌파로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번 총선에서 사민당은 완고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63세 올라프 숄츠 재무장관을 총리 후보로 내세웠는데, 이와 달리 녹색당은 41세 안나레나 배어보크를 총리 후보로 내세워 유권자들 관심을 끌고 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재무장관. 오는 9월 총선을 앞두고 사민당의 총리 후보로 지명됐다./AFP 연합뉴스

메르켈 집권 이후 사민당은 기민·기사당이 주도하는 연정(聯政)에 참여했다가 빠졌다가 다시 참여하는 등 우왕좌왕했다. 그러는 사이 지지자들 신뢰를 잃었다.

사민당이 시대 정신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도태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민당 같은 유럽식 중도좌파 정당이 내세우는 핵심 정강 정책인 노동자 권익 신장과 사회보장 제도 확립은 더 이상 이슈가 되지 않고 있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유럽에서 2000년대 이후 사회복지 제도가 완성 단계에 도달하자 중도좌파 정당이 목표점을 상실했고, 핵심 지지 세력인 노조의 사회적 영향력도 감소했다”고 했다. 사민당의 당원은 1990년 90만명 가량이었지만 2010년부터는 40만명대로 줄어들었다.

사민당이 주도하던 사회적 의제가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이 환경보호가 주도적인 이슈로 떠오르면서 좌파 진영의 중심축이 녹색당으로 옮겨졌다. 특히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지구 온난화를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커진 것이 녹색당에는 호재, 사민당에는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