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프랑스 엘리트 고등교육의 상징인 국립행정학교(ENA)가 내년에 문을 닫는다. 전·현직 대통령 4명을 비롯해 프랑스 최고의 정·관계 인재를 배출했던 명문 교육기관이 77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8일(현지 시각) 자신의 모교인 ENA를 내년에 폐지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마크롱은 이날 공무원들과의 화상 회의에서 “ENA를 대체하는 공무원 연수 기관 ‘공공서비스연구소(ISP)’를 새로 설립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ISP는 다양성 확보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라고 말했다.

ENA는 그동안 상류층의 전유물이라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마크롱은 지난 2월 ENA 폐교를 시사하면서 “사회적 엘리베이터(신분 상승 사다리)가 50년 전에 비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NA는 프랑스 특유의 고등교육기관인 ‘그랑제콜(Grandes écoles)’ 중에서도 대표적인 학교다.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이 1945년 전후(戰後) 국가를 재건할 엘리트 양성을 목표로 세웠다. 1958년 대통령제 시작 이후 마크롱까지 8명의 대통령 중 4명이 이곳 출신이다.

개교 때 이미 30대 이상이었던 드골, 조르주 퐁피두, 프랑수아 미테랑을 제외하고 학창 시절 ENA를 선택할 기회가 있었던 전·현직 대통령 5명 가운데 이곳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니콜라 사르코지뿐이다.

이뿐만 아니라 장 카스텍스 현 총리를 포함해 최근 40년 사이 총리를 지낸 17명 중 9명이 이 학교 동문이다. 브뤼노 르메르 경제부 장관, 플로랑스 파를리 국방부 장관을 포함해 현직 장관 6명이 ENA를 졸업했고, 알렉시 쾰러 대통령 비서실장 또한 동문이다. 이곳 출신들을 ‘에나르크(énarque)’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끈끈하게 서로 밀고 끌어주면서 프랑스 사회의 핵심 요직을 독차지해왔다.

관치가 강한 프랑스 사회의 특성이 반영돼 주요 대기업 최고경영자에도 ENA 출신이 즐비하다. 루이 슈바이처 전 르노 회장, 장 시릴 스피네타 전 에어프랑스 전 사장, 기욤 페피 전 SNCF(국영철도공사) 사장을 포함해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를 ENA 출신이 차지한 사례가 많다. 석학으로 이름이 알려진 자크 아탈리, 기 소르망도 졸업생이다.

국제기구 고위직 중에서는 파스칼 라미 전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장 클로드 트리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대표적이다.

프랑스 북동부 도시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국립행정학교(ENA) 입구에 있는 간판/AFP 연합뉴스

ENA는 극소수 엘리트주의를 지향한다. 한 해 80~90명만 선발한다. 대학 3학년 이상에 준하는 학력을 갖고 있어야 입학 시험을 치를 자격을 얻는다.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도전하지만 지원자 대비 합격률은 6% 정도다. IMF(국제통화기금) 총재를 지낸 크리스틴 라가르드 현 ECB 총재도 두 번 도전했지만 모두 낙방했다. 대체로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의 최상위권이 합격의 영예를 얻는다. 마크롱 대통령과 카스텍스 총리가 이런 케이스다.

에나르크 되기가 얼마나 바늘 구멍인지는 고등학교 숫자 대비 입학 정원을 감안해보면 된다. 내년에 학업을 마치는 마지막 ENA 입학생은 83명이며, 프랑스 전역에 인문계 고등학교는 약 2600개교다. ENA 입성에 성공하는 이가 31개 고교당 한명꼴인 셈이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국립행정학교(ENA) 캠퍼스/ENA

2년 과정인 ENA는 교육 방식도 독특하다. 전임 교수가 단둘뿐이다. 외국어로서의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교수와 스포츠 전공 교수 한명씩이 전임 교수의 전부다. 수업 대부분은 연간 1500명에 달하는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 철저한 실무 교육으로 진행한다. 특히, 동문 선배 고위 인사가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때 요령을 가르친다. 교수가 학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선배가 후배를 가르친다는 얘기다. 재학생은 1691유로(약 225만원)의 월급까지 받고 공부한다.

이곳을 졸업하면 성적순으로 희망하는 부처에 배치된다. 곧바로 한국의 서기관급 지위에 투입된다. 출세가 빠를 수밖에 없다. 마크롱은 만 36세에 경제부 장관이 됐는데, 에나르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게 중론이다.

마크롱 행정부의 첫 총리였던 에두아르 필리프(왼쪽) 현 르아브르 시장과 두번째 총리인 장 카스텍스 현 총리. 둘 다 국립행정학교(ENA) 졸업생이다.

마크롱은 2019년부터 ENA 폐지를 예고했다. 프랑스 사회의 불평등과 생활고에 불만을 품은 이른바 ‘노란 조끼’ 시위에 따른 민심 수습 대책 중 하나였다. 마크롱은 재선을 노리고 있지만 코로나 사태 방어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대선이 1년 남은 현재 지지율이 30%대로 추락했다. 그래서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마크롱이 ENA 폐교 카드를 꺼냈다고 프랑스 언론들은 보도했다.

그러나 ENA 폐지가 마크롱에게 정치적 이득이 될지는 미지수다. ENA가 워낙 ‘그들만의 리그’라서 관심 없는 프랑스인이 많기 때문이다. 일부 졸업생들은 “마크롱이 자신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ENA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며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시라크 행정부 시절 정부 대변인(장관급)을 지낸 장 프랑수아 코페는 일간 르파리지앵 인터뷰에서 “모교가 사라진다니 슬프다. 마크롱은 포퓰리스트의 길을 걷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