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부터 아이치이(중국판 넷플릭스)에서 방영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농사를 짓자'./아이치이 캡처

‘우리는 모든 청년 시청자가 식량 안보의 중요성을 깨닫길 바랍니다.’

중국에서 최근 뜨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인 ‘농사를 짓자[種地吧]’ 1화는 이처럼 공익광고를 연상케 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 프로그램은 19~26세 남자 배우·아이돌 가수 10명이 저장성 항저우시 싼둔진(鎭)의 축구장 13개(약 9만5000㎡) 크기 농지에서 190일 동안 농사를 짓는 과정을 담았다. 식량 25t을 생산해 판매까지 완료하는 것이 목표다. 얼핏 보면 한국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와 비슷하지만, 자연을 즐기는 힐링물이 아니라 출연진이 ‘진짜 농부’가 되어 농촌에 장기 거주한다는 점이 다르다. 지난 2월 4일 아이치이(중국판 넷플릭스)에서 첫 방영 이후 지금까지 44회가 공개됐다. 중국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예능 시청률 2위에 올랐고, 중국 평점 사이트 ‘더우반(豆瓣)’에서 9.0점을 기록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농사를 짓자’는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다. 중국의 ‘신(新) 하방(下放·도시 청년을 농촌으로 내려보낸 정치 캠페인)’ 운동을 위한 선전 프로그램이다. 청년들의 우상인 아이더우(愛豆·아이돌의 애칭)들이 화려한 의상과 조명을 포기하고 콤바인(수확기)·트랙터를 모는 모습을 보여주며 ‘농사는 영광스러운 일’이란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이 프로그램에 대해 “중국 지도부가 최근 주력하는 ‘농촌 띄우기’의 일환”이라고 평가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최근 “대졸자도 농촌으로 내려가 경력을 쌓아야 한다” “청년들이 농촌 재생 최전선에 서야 한다”고 말하며 도시 청년들의 농촌행(行)을 적극 독려하고 있다. 이에 맞춰 광둥성은 2025년 말까지 대졸자 30만명을 농촌으로 보내는 것을 목표한다고 밝혔고, 다른 지방정부들도 매년 농촌에 수만명의 대졸자를 보내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농사 장난 아니네” - 중국 예능 프로그램 ‘농사를 짓자’에 출연한 19~26세 배우와 아이돌 가수들. 이들이 농사짓는 과정을 담은 이 프로그램은 고학력 청년들의 귀농을 권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아이치이

프로그램의 포스터는 모병 홍보물을 연상케 한다. 청년 10명이 일렬로 서서 농기구를 높이 들고 있거나 엄지를 치켜세운 모습이다.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엔 제1차 세계대전 중 만들어진 포스터 ‘미국은 널 원한다(I Want You)’처럼 중국이 청년들을 농촌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강력한 선전물을 만들었다는 분석 글이 많이 올라오고 있다.

프로그램 전반엔 중국 지도부가 청년들에게 강조하는 ‘세 가지 농촌 과업’이 충실하게 담겼다. 첫 번째는 ‘식량 안보’ 확보다. 1화 시작 10분도 채 되지 않아 출연자들이 ‘농업 수업’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농업 기술 전문가인 차이런샹 저장성농업기술확산센터 교수는 “중국은 식량 소비가 가장 많은 국가인데 농촌 인구의 고령화로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한다. 출연자들 또한 자연스럽게 농사를 짓다가 난데없이 “중국은 식량 공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시진핑이 작년 10월 당대회 때 “중국인의 밥그릇은 우리 스스로의 손에 단단히 쥐고 있어야 한다”고 했던 발언을 연상케 하는 내레이션도 때때로 나온다.

농촌의 첨단기술 도입, 고난을 이겨내는 강인한 정신도 계속 강조된다. 출연자들은 직접 농기계 운전법을 익히고, 드론 등을 접목한 애그테크(농업 기술)에 관심을 보인다. 청년들이 첨단기술을 이용한 농업 혁신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정신 개조’도 중요한 키워드다. 한 출연자는 “농지 생활을 통해 진짜 터프한 남자가 됐다”고 했고, 또 다른 출연자는 “군중과 함께하는 생활이 언제나 옳다”고 했다. 프로그램은 과거 중국의 예능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농촌의 현실도 숨기지 않는다. 들어가기 끔찍한 야외 화장실, 너저분한 시골집 내부, 가축 배설물도 그대로 나온다.

중국에서 연예인들을 총동원해 청년들의 농촌행을 부추기는 이유는 ‘신하방’이 현재 중국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묘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현재 청년 취업난이 극도로 심해져 청년 실업률이 20%를 넘어섰다. 분노가 축적된 불만 세력인 ‘노는 청년’들이 시골로 내려가면 사회 불안 요소가 제거될 수 있다. 또한 미국의 공급망 봉쇄 방어와 경제 안정을 위한 식량 자급자족이 중국의 급선무가 된 상황에서 청년들이 대거 농촌으로 내려가면 생산량 증대뿐 아니라 농업 현대화도 빨라질 수 있다. 신하방이 시진핑의 최대 관심사인 농촌 진흥과 사회 불안 해소의 일석이조 효과를 낼 수 있는 셈이다. 시진핑은 지난 5월 중국 대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선 “농촌 진흥의 무대에서 공을 세우고, 농업의 현대화를 위해 청춘의 힘을 보태라”고 했다.

문화혁명(1966~1976년) 시절 하방을 직접 경험했던 시진핑이 중국에서 하방을 되살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마오쩌둥은 문화혁명 기간 수백만명의 도시 거주자를 시골로 보냈다.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의 장남인 시진핑은 16세에 산시성의 농촌으로 쫓겨갔다. 시골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도모했지만 어머니가 붙잡아 다시 시골로 내려보냈다. 중국은 시진핑이 하방 당시 머물던 토굴을 ‘시진핑 성지(聖地)’로 단장해 홍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