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 러시아 점령지 4곳에서 실시 중인 ‘주민 투표’가 러시아의 감시와 강요 아래 전형적인 부정 투표로 전락했다. 무장 군인이 민가를 수색해 투표하지 않은 유권자를 끌어내고, 찬성과 반대 중 어느 쪽에 기표했는지 훤히 보이는 투명한 투표함을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는 주민 투표 결과를 근거로 이들 점령지를 빠르면 이달 중 자국에 병합하려 하고 있다.

기표 훤히 보이는 투표함 - 23일(현지 시각)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에서 한 여성이 집까지 찾아온 선관위원 앞에서 러시아 영토 합병 여부에 대해 기표하고 있다(위 사진). 아래 사진은 투표용지 내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표함. /타스 연합뉴스

AP와 로이터통신 등 외신은 24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의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남부의 헤르손과 자포리자 등 러시아 점령지 4곳에서 실시 중인 주민 투표가 민주주의 투표의 기본 원칙을 무시한 채 폭력적 방식으로 실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지 주민 증언 등에 따르면 기업 대표가 직원들에게 투표를 강요하거나, ‘투표를 거부하면 보안국에 통보하겠다’고 위협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친러 당국은 투표 기간인 27일까지 투표하지 않은 주민들의 여행을 금지했다. 세르히 하이다이 루한스크 주지사는 “무장 군인들이 집안을 뒤져 (투표를 하지 않으려) 숨은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엔 친러시아였던 주민 중 일부가 최근 반러로 돌아서 투표를 꺼리는 경우가 생겼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밀투표의 원칙도 무시되고 있다. 투표용지는 윗부분에 “(자신이 사는 지역이) 러시아 연방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찬성합니까”라는 질문을 쓰고, 용지 아래 절반을 ‘예’ ‘아니오’ 두 칸으로 나눠 놨다. 기표(記票)가 가운데 되어 있으면 찬성, 아래에 있으면 반대인 것이 쉽게 드러난다. 우크라이나 현지 매체들은 “유권자들이 자기 집 부엌과 마당에서 기표를 하고, 접지도 않은 투표용지를 투명 플라스틱 투표함에 넣고 있다”고 전했다. 선관위원이 투명 투표함을 메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투표용지를 받는 사진이 여러 러시아 매체에 실리기도 했다. 러시아는 지난 2014년 크림 반도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주민 투표를 했다. 러시아는 당시 “81%의 투표율에 97%의 찬성률이 나왔다”며 크림반도 합병을 강행했다.

국제사회는 이번 투표를 ‘사기(sham)’로 규정하고, 결과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주요 7국(G7) 정상들은 이날 공동 성명을 내고 “이번 투표는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주민을 노골적으로 협박해 이뤄지는 ‘사기 주민 투표’로 법적 효력이나 정당성이 전혀 없다”고 선언했다. G7은 또 “우크라이나 영토를 불법적으로 합병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지원하는 러시아 안팎의 개인과 단체에 경제적 대가를 추가로 치르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도 “이번 주민 투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불법 합병하기 위해 유엔 헌장과 국제법을 무시하고 벌이는 조작 행위”라고 했다.

러시아는 국제사회의 반발을 무시하고 있다. 발렌티나 마트비옌코 러시아 상원의장은 “아무도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근거가 없는 방식으로 투표가 실시되고 있다”며 “주민들의 의지 표현은 유엔 헌장과 국제 규범을 준수하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27일 투표가 종료되는 즉시 이들 점령지의 합병 절차를 시작할 계획이다.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은 “오는 28일 우크라이나 점령지 합병을 위한 법안이 국가두마(하원)에 제출되고, 29일 검토 및 채택이 이뤄진 후, 30일 상·하원 양원 합동 회의에서 합병이 선포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관영 리아노보스티통신은 “푸틴 대통령이 30일 공식 연설을 할 수 있다”고 전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의 사이비 투표는 국제법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법을 위반한 범죄”라며 “반드시 전 세계가 규탄하고,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성명을 통해 “미국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우크라이나가 아닌 다른 그 어느 나라의 것으로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며 “동맹 및 파트너 국가들과 협력해 러시아에 추가 스위프트(국제결제망) 차단 및 막대한 경제 비용을 안기는 제재를 신속히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블룸버그 통신은 “러시아가 내년도 국방비를 올해 상반기 계획보다 43% 증액하기로 했다”며 “전쟁 장기화에 대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