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시네마 클래식’은 영화와 음악계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는 ‘이야기 사랑방’입니다. 전·현직 담당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취재 뒷이야기와 걸작 리스트들을 소개해드립니다. 오늘은 김성현 기자가 ‘피아노의 날’ 행사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피아노의 날 로고

3월 29일은 ‘피아노의 날(Piano Day)’이었습니다. 피아노 건반이 88개라는 점에 착안해서 매년 88번째 날을 지정해서 기념하고 있지요. 올해는 중국의 랑랑,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부흐빈더 등 세계 정상급 피아니스트 17명이 피아노의 날을 맞아서 온라인에서 2시간 50분 동안 ‘피아노 마라톤’을 펼쳤습니다. 한국의 조성진과 이루마도 이 마라톤에 참여했지요.

이날 행사는 피아니스트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연주하면 유튜브를 통해서 전 세계에 중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코로나의 시대상을 반영하듯이 이들은 객석이 텅 빈 무대나 스튜디오, 집에서 홀로 연주했지요. 화려한 연미복 대신에 편안한 일상복 차림을 택한 연주자들도 있었습니다.

'세계 피아노의 날' 이미지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쇼팽의 ‘즉흥곡 1번’을 들려줬습니다. 연주 직전에 그는 “버려진 공연장에서 온 이 멋진 피아노와 함께 독일 함부르크에서 쇼팽 음반을 녹음하고 있다. 즐겁게 감상하시기를”이라는 짧은 인사말을 덧붙였지요. 마지막 연주자로 나온 이루마는 자작곡 ‘전망 좋은 방(Room with a View)’ 등을 연주했습니다. 이루마는 지난해 빌보드 클래식 음반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지요.

피아니스트 키트 암스트롱

이날 참가자들 가운데 가운데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연주자 세 명이 있었습니다. 우선 1992년생 대만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키트 암스트롱입니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한 영재 출신의 음악인입니다. 아홉 살 때 유타 주립대에서 생물학과 물리학, 수학과 음악을 함께 공부했지요. 2003년에는 커티스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펜실베이니아대에서도 화학과 수학을 공부했다고 하네요. 어릴 적부터 음악과 학문을 병행한 ‘이도류(二刀流)’라고 할까요.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인지 상상하기 힘들긴 하지만요.

이날 행사에서 그는 타이베이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의 남원(南院)을 연주 무대로 골랐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예술 작품과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라는 이유에서였지요. 그는 박물관 복도 한복판에 설치된 피아노에서 중국 전통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자작곡을 연주했습니다. 대만의 전통 문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장소 선정도 의미 있었지만 ‘에튀드 드 데셍(Études de dessin)’이라는 자작곡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드뷔시와 라벨의 프랑스 인상주의에 현대 음악의 요소를 가미한 듯한 매력이 있었지요.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야닉 네제 세갱

두 번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메트)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야닉 네제 세갱입니다. 그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메트, 캐나다의 몬트리올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 등 현재 이끌고 있는 악단만 세 곳에 이르는 명지휘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첫 악기는 바로 피아노였지요. 카운터테너 이동규씨의 음반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연주자가 바로 네제 세갱이었습니다.

‘피아노의 날’은 모처럼 그의 지휘가 아니라 피아노 솜씨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요. 이날 그는 캐나다 몬트리올 자택의 피아노 앞에 앉아서 라흐마니노프의 ‘악흥의 순간’을 연주했습니다. 그는 “모든 음악회가 중단된 상황이지만, 내 원래 악기인 피아노에 더 몰입하면서 친밀감을 되찾는 기회가 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지요. 네제 세갱은 피아노 독집도 내놓을 것이라는 계획도 밝혔습니다. 이렇듯 코로나는 예전에 미뤄두고 있던 일에 재도전할 기회가 되기도 하지요.

키릴 게르스타인

마지막은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스타인입니다. 현대음악 전문 연주자로 명성이 높은 그는 프랑스 파리의 텅 빈 공연장을 무대로 택했습니다. 이날도 그는 영국의 동시대 작곡가 토머스 아데스와 얼마 전 타계한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 브라질 여성 작곡가 시키냐 곤자가(1847~1935)까지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시대와 대륙, 장르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그의 선곡을 보고 있으면 지극히 21세기적인 연주자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지요. 어쩌면 ‘작곡과 연주’(키트 암스트롱), ‘지휘와 연주’(야닉 네제 세갱), ‘현대음악과 재즈’(키릴 게르스타인)라는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특징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본래 작곡과 지휘, 연주가 하나였던 옛 전통으로 복귀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