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푸, 면도기 팔던 사람이 패션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샴푸를 만드는 팀과 패션·트렌드를 제시하는 디자인팀을 관리하는 건 전혀 다른 분야다.’

지난 2017년 여름, 미국 매체들의 헤드라인이 날씨만큼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수성가 디자이너이자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인 랄프로렌 그룹의 최고경영자(CEO) 교체 때문이었다. 스웨덴 패션 회사 H&M 출신의 스테판 라르손이 CEO 선임 2년 만에 매출 하락, 경영진과 겪은 잦은 마찰 등을 이유로 불명예 퇴진한 뒤 후임자로 지명된 사람은 뜻밖에도 미국 생활용품 기업 프록터앤드갬블(P&G) 출신의 퍼트리스 루벳이었다.

최근 기업설명회(IR)에 나선 랄프로렌 그룹의 패트리스 루베트 CEO. 인재 발굴에 능하다는 평을 듣는 그는 인터뷰에서 “창업자인 랄프 로렌에게서 사람을 중시하는 게 회사 운영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랄프로렌

마케팅 사관학교로 유명한 P&G에서 28년이나 근무하며 업계 잔뼈가 굵은 데다 2015년부터는 P&G 뷰티 부문 사장을 맡아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패션업계 사람들은 루벳에게 환영의 레드 카펫을 깔아주는 대신 깎아내리기 바빴다. 필요하니까 사야 하는 샴푸와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패션이 어떻게 같을 수 있냐는 지적이었다.

게다가 2017년 창립 50주년을 맞은 랄프로렌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이었던 랄프 로렌이 넥타이를 앞세워 회사를 세운 이후 디자이너이자 CEO로 명성을 날리며 2015년 그룹 사상 최대 매출(76억2000만달러) 신화를 일구고 명예롭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후임자인 라르손이 경영을 맡은 지 2년 만에 매출은 10억달러 가까이 감소한 상태였다. ‘위대한 개츠비’를 탄생시킨 미국의 욕망 그 자체였던 랄프로렌이 뿌리까지 흔들리는 상황이었으니 새 CEO에게 의구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의심을 의심하라

그때부터 5년이 지난 2022년, 그에게 냉정했던 매체들은 ‘회복’ ‘급성장’ 같은 단어를 쏟아냈다. 지난 9월 랄프로렌이 4년 만에 선보인 기업설명(IR)에 대해 미국 경제 전문 포브스는 “저가 도매로 기업 이미지를 갉아먹는 소매망을 개편하고 직접 판매(DTC·direct to consumer) 소비자를 2000만명 이상 새로 유치하는 등 진정한 럭셔리로 복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44억달러였던 매출은 2022년 62억달러로 41%나 상승했다.

여러 비판을 이겨내고 랄프로렌 그룹을 정상 궤도에 올린 루벳 CEO를 WEEKLY BIZ가 만났다. 그가 랄프로렌을 대표해 인터뷰에 나서기 시작한 건 최근 들어서다. 지금까지 인터뷰 횟수도 다섯 손가락 안이다. 그동안 랄프로렌 그룹에서 랄프로렌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랄프 로렌 그 자신뿐이었기 때문이다. 루벳에 대한 랄프 로렌의 신뢰가 얼마나 두터워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을 찾은 루벳 CEO는 “혹독한 비판의 시선이 오히려 문제 해결 방법을 알려줄 발견 기회였다”고 말했다. “P&G에서 사장을 맡으면서 고가 화장품인 SK-II 운영을 비롯해 구찌·돌체앤가바나·휴고보스 등 럭셔리 회사들과 파트너십을 맺으며 향수 사업을 확대한 바 있습니다. 대중한테 사랑받는 동시에 새로운 소비자를 찾아 나서는 게 저의 소명이었죠. 소비자들에게 화제를 일으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됐습니다. 동시에 Z세대 같은 새로운 소비자들이 탄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흥분시켰습니다.”

랄프 로렌 그룹이 공식후원하는 2022 윔블던 경기에 한국 앰버서더로 초청받은 배우 겸 가수 크리스탈. /랄프로렌

◇패션 회사? 우리는 디즈니다

소비자에게 군림하거나, 소비자들의 허영심을 먹고 사는 시대는 끝났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새로운 세대 점령하기(Win over a new generation)’를 1번 전략으로 내세웠다. Z세대의 ‘놀이터’를 찾기 시작했다. 메타버스 게임 플랫폼인 로블록스와 재빠르게 손잡았다. 지난해엔 로블록스에서 각종 컬렉션을 선보였다.

루벳 CEO는 “모든 세대에게 쿨(cool·멋진)해 보이는 게 살아남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10대든, 40대든, 70대든 같은 폴로 티셔츠를 입고 “멋지군” 하고 으쓱거려야 한다는 것이다. 제품은 같더라도 접근 방식은 다르다. 10대에게 랄 로렌은 게임부터 윔블던 테니스 후원까지 젊은 층과 소통이 잘되는 혁신적 브랜드라는 점을 어필한다. 40대에겐 랄프 로렌이 꿈꿨던 이상적인 삶을 상징하는 브랜드로, 베이비부머에겐 말 그대로 ‘아메리칸 드림’으로 이야기한다.

새로운 마케팅 전략 덕분에 국내에도 얼마 전부터 젊은 세대에게 ‘랄뽕’이란 신조어가 생겼다. ‘랄프로렌’과 ‘뽕 맞다’를 합친 말로 랄프로렌의 매력에 취한다는 뜻이다. 과거 X세대 ‘압구정 오렌지족’의 전유물이자 ‘아재 브랜드’로 꼽혔던 랄프로렌이 1020 세대에서 가장 뜨는 브랜드가 됐다. 단순한 디자인의 셔츠나 스웨트 셔츠(라운드티)라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로고와 고전적 디자인이 오히려 패션에 정통해 보인다는 것이다.

루벳 CEO는 ‘랄뽕’ 트렌드가 Y2K(2000년대 패션) 유행의 연장선상이라고 단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과거엔 마법 같은 능력을 지닌 디자이너의 비전만으로 브랜드가 부흥했습니다. 랄프 로렌이 대표적이지요. 그는 고급 스포츠로 꼽히는 폴로를 로고로 썼지만, 어쩌면 폴로 경기를 한 번도 안 해봤을 수도 있어요.(웃음) 이제 우리 역할은 단순히 돈을 버는 회사를 만드는 게 아니라, 랄프 로렌의 성공과 비전을 통해 재능을 중시하고 인재를 키우는 방식을 알리는 데 있습니다.” 루벳 CEO는 “랄프로렌은 보통의 패션 회사라기 보다는 오히려 디즈니에 가깝다”고 말했다. 패션이 아닌 ‘꿈의 사업’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여기서 행복합니까? 28년 만에 들은 질문

올해 83세가 된 랄프 로렌은 디자이너 세계에서는 어쩌면 독특할 수도 있다. 동성애자가 다수인 디자이너 사이에서 거의 몇 안 되게 가족을 꾸렸고, 아내에 대한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아내 이름을 딴 가방도 있다.

그런 랄프 로렌에 대해 루벳 CEO는 “오히려 신선했다”고 말했다. “랄프 로렌이 언젠가 제게 묻더군요. ‘당신은 여기 와서 행복합니까?’ 28년을 일하는 동안 회사에서 그 누구도 제게 묻지 않았던 질문이었어요. 잠깐 머리가 띵했죠. 랄프 로렌이 사람을 얼마나 아끼는지 깨닫게 됐어요. 사람을 중시하는 게 회사를 운영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됐죠.”

그는 랄프 로렌에게 배운 성공 비결도 귀띔해주겠다고 했다. “당신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무얼 옹호하는지 그것에 집중하세요. 그게 정답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게 랄프 로렌이 제게 매일 아침 하는 말입니다. 하하.”

패트리스 루베트

-1964년 프랑스 파리 출생

-1986년 프랑스 ESCP 유럽경영대학원 졸업

-1987년 미국 일리노이대학 경영대학원 졸업

-1989년~2015년 미국 P&G그룹

-2015년~2017년 6월 미국 P&G그룹 뷰티부문 회장

-2017년 7월~ 랄프로렌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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