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로 세계 경제가 깊은 침체에 빠지자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에 재정 위기가 닥쳤다. 관광 수입을 믿고 방만하게 재정을 운용하다 부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불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2890억유로(약 370조원)를 EU 등으로부터 지원받았다. 그 대가로 연금을 대폭 축소하고, 재정 지출을 줄이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10여 년이 지난 현재 유럽에서는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조짐이 보인다. 지난 10년간 힘겹게 줄여온 남유럽 국가들의 국가 채무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눈덩이처럼 불었는데, 최근 국채 금리 급등까지 겹치며 빚 부담이 가중됐다. 그러자 유럽 최대 부국인 독일과 남유럽 국가들 간 신경전이 오가며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질 모엑 AXA그룹 수석경제학자는 “2011년 유럽 부채 위기의 데자뷔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공포지수 치솟으며 위기감 엄습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유럽의 문제아’가 된 이른바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 국가들은 2012년 남유럽 재정 위기 이후 국가 채무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19가 터지며 이런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 이탈리아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2014년 135.4%에서 2019년 134.1%로 소폭 줄었으나 2020년 155.3%로 급등하며 2차 대전 이후 최고치를 찍었다. 지난해 150.8%로 소폭 하락하긴 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여전히 높다. 그리스도 2019년 180.7%이던 채무 비율이 작년 말 193%까지 급증했다.

최근 유로존 물가가 치솟고 남유럽 국가들의 국채 금리가 급등하면서 유로존 회원국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달 23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집행위원장,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부터)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AFP 연합뉴스

그래도 금리가 낮을 때는 견딜 만했다. 올해 초만 해도 이탈리와와 그리스의 10년물 국채 금리는 각각 1.19%, 1.32%에 불과했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으로 전 세계 금리가 상승하자 남유럽 국채 금리 역시 껑충 뛰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 국채 금리는 지난달 각각 4.17%, 4.65%를 찍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채 금리도 지난달 각각 3.1% 수준까지 올랐다. 국채 금리가 오른다는 것은 국가가 돈을 빌리기 위해 더 많은 이자를 지급해야 하고, 그만큼 재정 부담이 늘어난다는 의미다. 오건영 신한은행 부장은 “부채가 많고, 성장세도 낮은 이탈리아·그리스가 금리까지 오르면 또다시 재정 위기에 내몰릴 가능성이 커진다”고 했다.

남유럽 국가들의 금리가 치솟는 와중에도 탄탄한 경제를 앞세운 독일 국채 금리는 지난달 말 현재 1.3%대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자 유럽 금융시장 공포지수로 불리는 독일과 이탈리아 간 국채 금리 차이는 지난달 2.5%포인트까지 벌어져 2020년 5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에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달 15일 예정에 없던 긴급 통화 정책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는 “회원국 간 채권 금리 차이가 비정상적으로 커지면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방안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등 부채가 많은 국가의 국채를 사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또 뒤집어쓰라고?” 반발하는 독일… 10년전 데자뷔 경제 위기 때마다 쪼개지는 유럽

이를 바라보는 독일의 시선은 곱지 않다. 크리스틴 린더 독일 재무장관은 비공개 회담에서 “일부 유럽 국가 간의 국채 금리 격차에 대해 우려할 필요가 없다”며 “코로나19로 단행한 확장적 재정 정책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돈을 풀어 빚진 나라를 돕는 것보다 인플레이션을 잡는 게 우선이라는 얘기다.

영국 가디언은 “통화량이 증가하면 유럽 전역의 중산층은 물가 상승으로 저축할 수 없게 되고, 유권자들은 급진 정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커진다”며 “독일 입장에서는 1930년대 엄청난 물가 상승으로 인해 극우 정당이 득세했던 경험이 있어 더욱 찬성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상황은 처음이 아니다. 2010년 유럽 경제 위기 당시 그리스의 부채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독일은 “그리스를 지원하는 것은 회원국들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수 있다”며 반대했고, 구제금융에 대한 대가로 공무원 급여 삭감 등 강도 높은 재정 적자 감축안 등을 요구했다. 양임석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독일 국민은 상대적으로 그리스나 이탈리아보다도 복지 혜택이 부족하게 살고 있어 불만이 적지 않다”며 “그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니 아예 파티를 벌인다고 생각하기 쉽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경제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이런 갈등이 빚어지는 근본 이유는 유로존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유로화를 쓰는 19개 회원국은 스스로 국채를 발행해 돈을 빌릴 수는 있지만, 유로화는 ECB만 발행할 수 있다. 일반적인 국가는 빚이 많으면 통화 가치가 하락해 무역수지를 개선하고 실질 채무를 줄일 수 있지만, 단일 통화에 묶인 유로존 국가들은 쓸 수 있는 정책이 국채 발행뿐이다. 또 ECB는 각국이 낸 출자금으로 운영되고 그 지분율만큼 각국의 입김이 반영되는데, 독일 지분율이 21%로 가장 높다 보니 독일이 유로존 통화 정책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구조는 유로존이 유연한 통화 정책을 쓰는 데도 큰 걸림돌이다.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과감하게 금리를 올리는 다른 주요국들과 달리, ECB는 이달에야 11년 만에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할 예정이다. 인상 폭도 0.25%포인트(0%→0.25%)에 그칠 전망이다. 금리 인상에 취약한 남유럽 국가들 때문에 금리 인상에 머뭇거리는 사이 유로존 물가상승률은 지난 6월 8.6%까지 치솟으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어느 때보다 단합이 필요한 시기에 고조되는 유로존 내부 갈등은 정치적으로도 부담이다. 제재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단일대오가 필수이지만, 경제적 이해 관계가 나뉘면 대(對)러시아 공동 전선에서 이탈하는 국가도 나올 수 있다. 배선영 연세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결국 독일이 자기 예산을 다른 나라에 나눠 주는 방식으로 유로존의 재정 통합이 이뤄져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며 “지금처럼 유로존의 통합 정도가 느슨하면 경제 위기 때마다 유럽의 쪼개지는 현상은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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